이례적으로 대낮에 판을 벌인 술자리다. '괜찮을까' 싶었던 마음도 잠시, 예쁜 꽃다발 하나를 스윽 내민 배우 엄지원(39)은 "나 어제 꽃을 너무 많이 받았거든요. 예쁜건 서로 나누면 좋잖아"라며 기자의 품에 턱 안겼다. 깍쟁이 같은 이미지는 만난지 1분 만에 사라졌다. 이 언니 의외로, 꽤 많이 터프하다.
'꺄르르'라는 웃음 표현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엄지원과의 만남은 영화 '마스터(조의석 감독)' VIP시사회가 치러진 바로 다음 날 이뤄졌다.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진 뒤풀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상황. 엄지원은 "딱 좋게 취해있는 것 같다"며 취중토크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성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이언희 감독)'와 1000만 프로젝트라 불린 '마스터'까지 의미있는 두 작품을 통해 2016년 한 해 열심히 달린 엄지원이다. '마스터'는 71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엄지원은 역대급 걸크러쉬를 자랑하는 캐릭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빼곡한 스케줄로 인해 12월이 넘어서야 함께 자리할 수 있었지만 그 만큼 하고 싶은 말도, 에피소드도 잔뜩 쌓였다. '미씽'에 대한 고마움, '마스터'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표출한 엄지원은 "제가 사실 '마스터' 속 젬마의 성격과 많이 닮았어요. 터프한 구석이 좀 있죠"라며 데뷔 18년차 여배우로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털어놨다.
힘들지 않았을리 없고 "왜?"라는 물음표도 달고 살았다. '왜 나에겐 잘 쓰여진 작품이 안 들어오지?'라는 생각에 속상한 적도 많았다. 대중과 예상치 못한 오해가 생겼을 때도 '입을 닫고 살아야 하나' 수 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의 엄지원은 그 시간을 '근사하다'고 표현한다. "근사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결혼 후에도 연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또 결혼에 대한 특별한 로망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잘 사는 것 같다고. 최근 스페인어와 독일어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을 만큼 부지런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럽다. "여배우는 평소에도 관리해야 할 것들이 진짜 많아요. 두 시간 밖에 못 자 쓰러질 것 같을 때도 '운동하자. 해야지'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행복을 찾아가는 엄지원만의 방식이다.
열심히 일했으니 신년에는 열심히 휴식을 취할 작정이다. "일단 여행부터 다녀 오려구요. 개인적으로는 오스트리아가 정말 좋았어요. 힐링을 받고 나면 다시 열심히 일해야겠죠? 2017년은 어떨까 기대하고 있어요."
엄지원은 '마스터'에 함께 출연하기 전부터 동네 주민으로 절친한 배정남과 쌀국수 한 그릇을 먹기로 했다며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다. "제가 맛집은 잘 모르는데 요즘 쌀국수에 꽂혔어요. 맛집은 (강)동원이가 잘 알지. 맛집 찾아올게, 우리 다음엔 더 맛있는거 먹어요!" 어떤 단순한 이가 여배우를 '꽃'이라고만 표현 했을까. '멋지다'는 말을 100번 해도 모자람이 없다.
- 과거 MC 활동에 외국어 능력이 출중한 것으로 주목 받기도 했어요. "오늘도 오후에 스페인어 학원에 가요. 스페인어랑 독어를 새롭게 배우고 있어요. 우린 불규칙적인 직업이니까 촬영하지 않는 시간을 그냥 보내는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뭐든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채워 넣고 싶어요."
- 쉬고 싶지 않나요. "쉴 때도 있지만 계속 쉴 수 많은 없잖아요. 할 것도 많고. 특히 여배우는 관리해야 할 것들이 진짜 많아요. 운동도 해야 하고 솔직히 관리샵도 주기적으로 가야 하죠. '나는 가고 싶은데도 못 간다'고 말하면서 부러워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게 또 일이 되면 힘들어요. 너무 피곤해서 죽을 것 같고 쓰러질 것 같은데도 가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거든요. 두 시간 밖에 잠을 못 자서 '오늘은 죽어도 운동 못 가!' 하다가도 '아니야. 그래도 가서 운동 해야지' 하면서 저를 달래죠.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 능력들을 연기 외 다른 방향으로 뽐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MC도 재미있었고 나름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엔 라디오가 끌려요. 어렸을 때부터 해보고 싶었거든요. 라디오도 하나의 작품이라면 스태프들과 함께 공들여 만드는 것에 더 보람을 느껴요. 내가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하는지 자꾸 찾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 하고 싶은건 때마다 달라지니까요. "교육 제도도 그래요. 너무 이상하잖아. 학교 다닐 때는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부족하고, 또 내가 뭘 잘 하는지도 쉽게 알기 힘들죠. 점수·등수에 얽매여 아무것도 모른 채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그제서야 '난 뭘 하지? 뭘 할 때 행복하지?' 뒤늦게 찾기 시작하게 되잖아요. 요즘 친구들은 좀 다를까요? 전 그렇게 자란 세대라 답답함을 느꼈던 적도 많아요."
- 배우의 꿈을 찾은 후에도 그랬나요. "초창기에는 이것 저것 다 했죠. 배우를 하고 연기를 하기는 하는데 어쨌든 저만의 스타일이 분명 있을테니까. 지금의 저는 공들여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캐스팅이 되면 촬영 전에 인물에 대해 준비라는 것을 하잖아요? 시나리오를 받고 회의에 회의를 거쳐 몇 개월을 준비하고 촬영에 들어가면 한 팀, 함께 가는 동반자라는 믿음이 생기죠."
- 그런 부지런함을 닮고 싶네요. "근데 또 사람이 누구나 다 꼭 부지런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다 하는 이유는 결국 행복해 지기 위함이에요. 안 해서 행복하면 안 하는 것이 맞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진짜를 아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그런 교육 시스템과 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래야 평균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따지지만 각자 자신의 색깔만 확실하면 된다고 봐요." - 개인적으로 애착·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옛날부터 많이 받은 질문이에요. 근데 전 그 질문이 그렇게 어려웠어요. '어떻게 한 편을 고르지? 다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고르지?' 싶었죠. 답을 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그 질문이 다시 떠오르더라구요. '나 옛날에는 그런 질문도 참 많이 받았는데' 생각하면서 웃었죠. 그리고 변화된 마음에 놀라기도 했어요. '그 땐 어려웠는데 지금은 말 할 수 있겠다'"
- 어떤 작품인가요. "일단 영화 '똥개'가 있죠. 제가 오디션 봐서 처음으로 주인공 자리를 따낸 영화예요. 영화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이니까 너무 중요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소원'이 있어요. '소원'은 저에게 또 한 번 퀘스천 마크를 준 작품이에요. 금방 답할 수 없는 질문이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답을 찾게 되는 질문이라는걸 알았죠."
- '소원'은 제목만 들어도 울컥하게 만들어요. "당시 인터뷰를 할 때 기자들 중에서도 우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 영화 해주셔서 고마워요'라는 말도 들었죠. 저도 같이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뭔가 미라클? 매직같은 작품이라 생각해요. 지금은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씽'도 그런 작품이 되겠죠. 4~5년 정도 지나야 '미씽'이 저에게 어떤 작품이었는지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아쉬움이 남는 작품도 있다면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좋아했는데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고 많이 저평가 됐다 싶은 작품이 한 편 있어요. '흥행 실패 때문에 마음에 아프다'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에요. 임창정 오빠와 연기했던 '스카우트'라는 영화죠. 1980년대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선동렬 선수를 스카우트 하러 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냈는데 영화가 굉장히 좋아요. 연기를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품에 대한 자신감은 여전해요."
- 드라마도 있나요. "JTBC '무자식 상팔자'요.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운 작품이고 저에게 특별한 작품으로 평생 남을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들과 함께 연기한 적이 거의 없어요. 그런 면에서 '아쉽다, 부족하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무자식 상팔자'는 이순재·유동근·김해숙·송승환·견미리·임예진 선생님 등 쟁쟁한 선생님들이 대부분 다 나오셨거든요. 선생님들이 배틀처럼 연기하실 때가 있어요. 그 에너지를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저도 '무자식 상팔자'가 처음이었는데. 귀한 시간이었고 '이건 너무 근사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 작품이 있으면 통장에 저금해 둔 기분이라고 했어요. 지금의 통장 상태는 어떤가요. "내 통장! 슬슬 잔고가 보이고 있어요. 재작년에는 진짜 꽉 차 있었는데. 얼른 채워야 해요." - 다양한 작품이 들어오지 않나요. "진짜 할게 없는데 그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하는 거예요. 어쩔 때는 너무 없으니까 들어가서 만들어서 할 때도 있구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죠. 그리고 제 위치가 혼자서 다 잘 할 수 있는 메인 스타는 아니기 때문에 연기적인 행보도 신경써야 해요.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제 자신이겠지만 또 가장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조언도 많이 구하죠. '이 시나리오 베스트야! 연기만 잘하면 돼!' 싶어 선택한 작품은 손에 꼽히는 것 같아요. '방향이 수정되고 최고로 잘 만들어진다 치면 이 정도까지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하는 거죠."
- 좋은 작품에 대한 갈망이 있을 것 같아요. "배우는 쓰여진 것을 보면서 그대로 연기만 하면 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과거엔 그랬죠. 그래서 '왜 잘 써진 작품이 없지? 나도 그런 작품 만나고 싶은데 왜 나한테는 안 와~'라면서 억울해 했던 적도 있어요. B를 할 수 밖에 없으니까 B를 선택해서 꾸역꾸역 가는 것이 많이 서글펐죠.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자산이 되는지, 배우 생활 전체를 봤을 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겠더라구요. 지금은 하나 하나에 감사하고 있어요."
- 작품을 선택할 때 남편의 조언도 얻나요. "아니요. 결정하고 나서는 보여주는데 조언을 구하지는 않아요. 어차피 연기는 제가 해야 하는 거니까."
- 결혼생활은 어떤가요. 로망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저는 성격이 스위트 하기도 한데 터프한 면도 있거든요. '마스터' 젬마 성격과 비슷해요. 예림이 같을 때도 있지만 젬마가 더 가깝죠. 그래서인지 많은 여자들이 갖고 있는 결혼에 대한 로망이 애초에 없었어요. 결혼할 때 드레스를 입으면서도 '아휴, 드레스 고르기 너무 싫다! 웨딩사진도 싫어!'라고 투덜거렸죠.(웃음) 근데 그런 것이 없어서 잘 사는 것 같기도 해요. 기대나 환상이 있으면 실망도 있을텐데 선(先)이 없으니까 후(後)도 없죠. 가끔은 그런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 결혼 후 다른 행보를 걷는 여배우들도 많아요. "결혼과 상관없이 배우가 연기를 대하는 시선의 차이, 일하는 방법의 차이인 것 같아요. 어떤 배우는 꾸준히 연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어떤 배우는 잠깐 잠깐 하고 싶어할 수도 있죠. 결혼을 해도 각자 일하는 스타일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전 여전히 연기 욕심이 있구요.(웃음)"
- 중요도가 달라지는 것일 수도 있겠구요. "맞아요. 어쨌든 결혼을 하면 동반자가 생기고, 그 동반자는 내 인생에 어떠한 뱡향으로든 영향을 끼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받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하잖아요. 작품을 띄엄띄엄 하는 배우들은 연기보다 더 좋은 것을 찾은 것일 수도 있구요. 결국 각자 가장 행복한 것을 찾아가기 마련이죠. 저도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을 안 하면 안 되는 주의라.(웃음) 아직은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겠어요. "연기하는 친구들끼리는 늘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 70~80대가 돼서도 연기 하겠지? 할 수 있겠지?'(웃음) 근데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지금은 영화를 많이 찍어야 한다고 하죠. 영화는 어쨌든 관객들이 티켓을 구매하고 영화관을 찾아줘야 하는데 나중에 아무도 안 사주면 누가 날 찾고 어떻게 찍을 수 있겠어요.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 때까지 하고 싶지만요."
- 신년 계획은 세웠나요. "열심히 일했으니까 열심히 쉬려구요. 연초에 여행 가요.(웃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는 오스트리아요. 그래서 독어도 배우기 시작했구요. 다녀와서 다시 분발해야죠. 좋은 작품으로 찾아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