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WBC 예선에 필리핀 대표팀으로 참가한 오가와 류야. “필리핀 국기를 짊어질 각오했다”
필리핀 대표팀으로 2013 WBC 예선에 참가했던 주니치 드래건스 왼손 투수 오가와 류야의 소감이다.
오가와는 1991년생으로 일본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를 둔 혼혈 일본인이다. 당시 필리핀 대표팀은 태국, 대만, 뉴질랜드와 함께 예선 4조에 포함돼 있었다. 필리핀야구협회는 전력 구축을 위해 필리핀 혈통인 야구선수를 찾았다. 오가와뿐 아니라 어머니가 필리핀계 미국인인 팀 린스컴에게도 요청했다. 린스컴은 2012년까지 사이영상 두 번에 올스타전 출전 4회를 자랑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였다.
당시 오가와는 주니치의 2년 차 선수로 2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오가와에게도 더 많은 경험이 필요했고, 주니치도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어차피 오가와는 주축 선수가 아니었고, 대회가 열린 2012년 11월은 가을캠프 시즌이었다.
필리핀은 예선 첫 경기서 태국을 8-2로 눌렀지만 다음 경기에서 대만에 0-16으로 대패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 6-10으로 패하며 1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대만전 패전 투수가 오가와였다. 필리핀 대표팀이 '에이스'를 가장 강한 상대에 내보냈던 셈이다. 4이닝 동안 삼진 5개를 잡았지만 안타 5개, 볼넷 4개로 3실점 했다.
오가와는 필리핀 대표로 뛰며 배운 점이 많았다고 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외국 문화에 거부감이 없다. 서로 배우며 사람 사이의 교류를 느꼈다”고 했다.
당시 필리핀 선수들은 오가와에게 러닝부터 여러 야구 훈련 방법을 배웠다. 오가와 역시 메이저리그 헤노 에스피넬리에게 슬라이더를 비롯해 변화구 그립 등을 전수받았다. 필리핀계 미국인인 에스피넬리는 2008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15경기에 출전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오가와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필리핀 대표팀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외국에 뿌리를 둔 아이들을 위해 꿈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가와는 WBC 출전을 계기로 필리핀에서 야구교실을 여는 등 야구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가와뿐 아니다. 브라질 대표팀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출신인 마쓰모토 유이치, 가나바시 우고, 사토 지로 등이 뛰었다. 브라질은 1908년부터 일본인들이 이민했던 나라다. 2013 WBC 대표팀에는 이들 외에도 일본식 성을 쓰는 선수가 여섯 명이나 됐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 국가대표로 WBC 출전이 가능한 선수는 더 있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마무리 투수 야마자키 야스아키의 어머니는 필리핀인이다. 야마자키는 2014년 10월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된 뒤 “오가와와 다른 선수들의 상황은 알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해 보고 싶다”며 필리핀 대표팀 참가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야마자키는 프로 2년 통산 117경기 114이닝 평균자책점 2.76을 기록한 센트럴리그 철벽 마무리다. 올해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예비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야마자키가 필리핀 대표팀에 관심이 있다고 한 만큼 언젠가 그가 색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토네 치아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최근 두 시즌 76⅔이닝 평균자책점 3.64를 기록한 구원투수 토네 치아키도 필리핀 대표팀 선발이 가능하다. 토네는 일본 대표팀 선발 당시 “한곳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세이부 라이온스의 유망주 투수 사노 야스오의 어머니는 태국인이다. 태국 대표팀에 관심이 있냐는 언론의 질문에, “감사하지만 더 노력해서 일본 대표팀에 뽑히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말미에는 “선수 생활 말년에 자신의 뿌리가 있는 나라의 WBC 대표가 되는 빅리거들이 있다. 그때까지 괜찮다면...”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코치가 선수에게 해외 대표팀 차출 요청이 올 수 있도록 격려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5월 KBO 퓨처스리그 교류 경기를 위해 방한한 사사키 마코토 소프트뱅크 3군 코치를 만난 적이 있다. 그와 kt 위즈 소속 주권의 완봉승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사사키 코치에게 "중국 대표팀이 주권에게 관심이 있다"고 전하자 그는 한 소프트뱅크 선수를 부른 후 "너도 중국에서 요청이 올 수 있도록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선수 실명은 밝히지 않겠다. 그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런 기회가 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 "아직 중국에선 나를 모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선수는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2군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2021년 열리는 WBC에선 중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 프로야구에는 오토사카 토모(요코하마), 오코에 루이(라쿠텐), 구리 아렌(히로시마) 등 혼혈 선수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 야구계 주변에선 "과거엔 재일 한국인 출신 선수가 많았다면 앞으론 혼혈 선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국제 대회에선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WBC라는 대회는 독특하다. 미국 국적의 선수가 이탈리아 대표로 뛸 수 있고, 일본인 선수가 필리핀이나 브라질 유니폼을 입는다. 야구가 국제화가 덜 된 종목이기 때문에 나온 유연한 대표 선발 규정이지만, 신선한 '국제주의'다. 2017년 WBC에서 주권이 뛰는 중국 대표팀에 한국 야구팬들이 친근감이 느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