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한국시간), 일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은 LA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과 4강전에서 1-2로 석패했다. 1-1로 맞선 8회초 1사 2·3루서 애덤 존스의 3루수 앞 땅볼로 결승점을 내줬다. 34세 베테랑 3루수 마쓰다 노부히로가 전진하면서 포구를 시도했다. 정상적으로 포구가 이뤄졌다면 홈 승부가 가능했다. 그러나 마쓰다가 펌블을 저질러 타이밍을 놓쳤다. 1루로 송구해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일본 야구에서 미국전은 중요하다. 일본시리즈 우승팀과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맞붙는 대회는 일본 야구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이벤트다. 야구로 미국을 이긴다는 것이 일본 야구의 오랜 꿈이다.
야구(野球), 일본 발음으로 ‘야큐’라는 단어의 탄생도 그렇다. 일본에 야구가 도입된 해는 1872년이라는 게 다수의 설이다. 이때는 ‘베이스볼’이라고 했다. ‘야큐’는 1895년 교육자 쥬만 가나에가 고안한 번역어다. 그는 민첩성과 집단성이 요구되는 야구가 일본인의 민족성과 맞는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수입한 베이스볼을 ‘일본화’하는 과정에서 ‘야큐’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야구의 일본화는 더 가속됐다.
일본 야구계에서도 번트로 대표되는 희생정신과 지도자에게 복종할 것을 강조했다. ‘적성국 스포츠’라는 시선에 ‘야구는 일본인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대항 논리를 세운 것이다.
WBC는 일본 야구계에 있어 미국과의 ‘진검 승부’ 무대다. 월드시리즈 우승팀과 맞대결은 일본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올림픽은 일본에 매우 중요한 대회지만 메이저리그는 관심이 없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주최하는 프리미어 12에도 메이저리그 선수가 참가하지 않는다. WBC는 스프링캠프 시즌에 선수들이 컴디션을 100%로 끌어올리지 못한 몸 상태로 참가하는 대회라는 제약이 있다. 하지만 '미국을 이긴다'는 일본 야구의 숙원에는 현재 그 이상의 대회가 없다.
22일 석패 뒤 일본 야구계 안팎의 분위기를 들었다.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일본 내 WBC 중계권사인 제이스포츠(JSports)의 PD는 "중계 내내 경기 양상이 치열했다"고 만족해했다. 스코어에서 보듯, 9이닝 동안 점수 차가 2점 이상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긴 했지만 일본 특유의 '지키는 야구'를 유감없이 보여 줬다. 이 PD는 "흥행을 보장했던 경기 내용"이라고 평했다.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의 도요우라 쇼타로는 "단판 승부였지만 일본 야구의 경쟁력이 팬들에게 충분히 어필됐다"고 평했다.
일본 사람들은 패배를 빨리 인정하는 문화가 있다.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한 직원은 "역시 메이저리그는 메이저리그"라고 했다. 이어 "일본 프로야구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든다"고 말했다. 오릭스 버팔로스의 스카우트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했다.
닛칸스포츠의 한 기자는 고무적이었다. 그는 "오타니 쇼헤이가 없어도 일본 야구는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일본 야구의 넓은 저변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말이다. 상설 국가대표 제도를 운영하는 일본 야구에서 니혼햄 파이터스 소속 투타 겸업 선수 오타니는 최대 상품이었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야구 언론이 2017년 WBC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선수로 오타니를 꼽았다. 하지만 발목 부상으로 결국 대표팀에서 사퇴했다.
이 기자는 "미국 강타자들에게 맞서는 스가노 도모유키(요미우리)의 투구는 굉장한 감동을 줬다"고 평했다. 스가노는 미국전에 선발 등판해 6이닝을 3피안타 1실점으로 막았다. 삼진은 6개를 잡아냈다. 전문가뿐 아니었다. 한 야구팬 모모이 슈이지는 "일본 투수들이 미국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장면은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패배는 패배다. 짚고 넘어갈 것은 분명히 있다"고 덧붙였다.
WBC는 메이저리그가 주도해서 만든 대회다. 일정과 경기 장소뿐 아니라 잦은 대회 규칙 변경도 미국에 유리하게 이뤄진다. 한편으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야구 시장을 자랑하는 일본도 발언권이 있다. 일본은 자국의 도쿄돔에서 1·2라운드를 치렀다. 여기에 1라운드 상대엔 다른 조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는 중국과 호주가 포함됐다. 야구는 타 종목에 비해 홈 어드밴티지가 적은 편이지만 단기전인 국제 대회에서 홈 팬의 응원은 무시 못 할 요소다. 22일 미국전은 일본의 이번 WBC 첫 '원정 경기'였다.
국가대표팀을 운영하는 NPB엔터프라이즈 관계자는 "도쿄돔을 벗어나니 우려가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회의 분패를 발판 삼아 다음 세대의 우승을 위한 교보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미·일전에서 졌지만 인터뷰에 응한 일본 야구계 안팎의 사람들은 22일 패배에 긍정적이었다. 물론 경기 내용을 납득했기 때문이다. 사실, 야구 경기에서 미국을 이긴다고 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미국을 이겼다고 하는 건 난센스다. 그저 이미지고, 상징일 따름이다. 미국을 향한 라이벌 의식이 어떻게 형성됐든, 미·일전이 일본 사람들을 야구에 조금 더 몰입하게 하는 이벤트라는 게 중요하다. 이런 경기는 선수들을 조금 더 집중하게 만들며, 경기에 뛴다는 자부심을 고양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