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대표팀 주전 수비수 마르쿠스 바벨이 1998년 10월 11일 울리 슈틸리케(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당시 독일 수석 코치의 훈련 방식에 대해 취재진과 나눈 인터뷰 내용의 일부다. 전술 부재와 훈련 효율성 부족으로 질타받는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19년 전 독일 코치 시절부터 같은 문제로 강도 높은 비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은 이렇다. 당시 독일은 2000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0) 예선 1차전(1998년 10월 10일)에서 한 수 아래의 터키에 0-1로 졌다. 터키를 상대로 47년 만에 기록한 패배였기 때문에 독일 선수단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슈틸리케 코치는 '새 회복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독일 일간지 벨트 1998년 10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슈틸리케 코치는 터키전 다음 날 회복 훈련에서 선수들에게 축구공으로 저글링을 시켰다. 보통 경기 이튿날은 가벼운 런닝으로 마무리한다는 기존 방식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슈틸리케 코치는 "패한 뒤 훈련장을 뛰는 것은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근육을 풀어 주는 훈련"이라며 새 프로그램을 소개했다는 게 벨트지의 보도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은 슈틸리케 코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불과 하루 전 터키전 패배로 침체된 독일 선수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황이었다. 제대로 소통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슈틸리케 코치가 밀어붙인 훈련 프로그램은 선수단의 큰 불만을 샀다.
바벨은 훈련 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며 분을 참지 못했다. 선수단 대부분의 의견도 "그냥 하던 대로 훈련을 했으면 한다. 슈틸리케 코치의 새 훈련은 우리를 우습게 만든다"고 하소연했다.
독일인들은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편이다. 그러나 축구에서 만큼은 선수가 지도자에게 맞서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슈틸리케 사건'을 두고 독일 유력 일간지 벨트는 "슈틸리케는 '레포름슈타우(Reformstau·개혁의 정체)'를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슈틸리케 코치의 새 훈련 프로그램이 선수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벨트는 '슈틸리케 사건'을 순화해 보도한 축에 속한다. 독일 선수들의 불만을 적나라하게 기사화한 언론도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일간지 함부르거 모르겐포스트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엉터리 같은 짓은 관두자'며 비웃었다"며 노골적으로 슈틸리케 코치의 훈련 방식을 비판했다. 베를리너 차이퉁은 "선수 중 한 명이 '슈틸리케 코치의 새 훈련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도 전했다.
한국과 달리 유럽은, 감독은 팀 전반적인 부분을 아우르고 수석 코치는 전술과 훈련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 2006 독일월드컵 시절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보좌하며 '전술가'로 이름을 날린 요아힘 뢰브 현 독일 대표팀 감독이 대표적 사례다. 감독보다 코치와 선수단 간 소통이 팀 성적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독일 언론은 '슈틸리케 사건'은 평소 소통 방식에 대한 불만이 쌓여 발생한 일이라고 분석했다. 벨트는 "슈틸리케 코치는 가끔 말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 코너킥 연습 때 선수들을 모아 놓고 몇 분씩이나 '일장 연설'을 하며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선수들은 이런 슈틸리케의 잔소리에 질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결과를 따져 봐도 슈틸리케가 야심 차게 시도한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독일은 유로 2000에서 1무2패의 굴욕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포르투갈, 루마니아, 잉글랜드에 밀려 조별리그 최하위로 탈락했다. 독일은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9월 시작한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한국을 이끌고 무기력하고 답답한 경기를 계속해 비판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슈티리케 감독의 가장 큰 문제를 전술·소통의 부재와 훈련 효율성 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 수 아래의 상대가 '맞춤식 전술'을 준비해 경기에 나서는 동안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않아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지난달 23일 중국 원정(0-1패)과 28일 홈 시리아전에서 졸전 끝에 가까스로 따낸 승리(1-0 승)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는 지난 3일 슈틸리케 감독의 유임을 결정했다. 그리고 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 구성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며 개혁을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슈틸리케 감독의 선수 시절부터 취재해 온 한 독일 베테랑 기자는 "당시 슈틸리케의 지도 방식은 너무 까다로워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좋았지만 선수들에게 적용시키지는 못했다"고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