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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588. 징비록에 담긴 글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임진왜란을 이겨낸 일등공신인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신숙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신이었던 신숙주는 임종 순간 성종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아무쪼록 왜와 화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갖은 만행과 악행을 직접 목격했다. 또 조선의 신하로 최선을 다해 일본과의 지긋지긋한 7년 전쟁을 치른 사람이다.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아는 유성룡이 왜 징비록에 신숙주의 유언을 담았을까. 더군다나 유언의 핵심은 일본과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얘기다.
일본과의 화는 신숙주, 유성룡 뿐 아니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도 언급했다. 해방 후 한창 반민특위로 나라가 시끄러울 당시, 김구 선생은 ‘친일파가 많을수록 무엇이 나쁜 것인가’라고 하였다. 상당히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놀라서 묻자 김구 선생은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먹고 반민족적으로 친일한 사람과,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분명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왕이면 일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다. 김구선생은 자신이 중국에 있을 때도 중국 사람들을 다 좋아했던 것은 아니며 인신매매, 아편장사 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었다고 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동학혁명 때 일본군과 싸우다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도 일본에 의해 불의의 객이 되셨다. 또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때는 중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시며 일본군과 싸웠고, 해방 후에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악질 친일파들을 청산하기 위해 총을 드셨다.
대대손손 독립유공자 집안에서 성장한 내가 일본과 화해야 한다면 결코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님을 많은 분들이 알거라 생각한다. 속뜻은 일본과 우리의 복잡한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은 2500년 전 백제에서 건너간 선배 재일교포 쯤 된다. 이는 천황가가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우리는 옛부터 일본에게 종교, 문화, 학문을 전해줬다.
일본이 끊임없이 다케시마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대응할 가치가 없다. 지구상에 다케시마란 땅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이 다케시마가 자신의 땅이라고 우기면 그냥 두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땅을 자신의 땅이라고 우기는 우스운 꼴이니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학병으로 끌려갔던 분이 자신은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다고 했다. 일본의 학병으로 싸운 게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따지자 그는 “내가 관동군에 있으면서 일본의 군량미를 많이 축냈으니 그것도 독립운동 아닙니까”라고 했다. 비록 우스갯소리이지만 과연 무엇이 독립운동이고 친일인지 잘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은 껄끄러운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북한은 수시로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고 중국은 여전히 북한을 후원하면서 사드배치에 대해서는 무차별 제재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일본은 불가근 불가원해야 하는 나라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겪었으면서도 유성룡이 징비록에 신숙주에 유언을 담은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한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