곪아 있었던 불화가 결국 터져 나왔다. 올해 19년 차를 맞은 국내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 KBS 2TV '개그콘서트'가 제작진과 코미디언 사이의 불화로 불명예스러운 900회를 맞았다.
'개그콘서트'는 지난 14일 방송부터 900회 특집을 진행 중이다. 국민 MC 유재석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던 특집 1탄은 5개월 만에 두 자릿수 시청률을 회복하며 재미를 톡톡히 봤다. 레전드 코너를 재연하며 화제도 모았다. 그러나 '개그콘서트'의 원조 멤버 정종철이 자신의 SNS에 제작진을 겨냥한 글을 게재하며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그동안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만 쉬쉬하던 '개그콘서트' 내의 적폐가 대중 앞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누구를 위한 900회인가
정종철은 '개그콘서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멤버다. 실제로 제작진이 꼽은 레전드 코너 19개 중 8개가 정종철이 출연했던 코너다. 그러나 정종철은 900회 특집에 초대받지 못했다. 방송 후 그는 '제작진이 만드는 것은 맞지만 제작진들만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900회까지 전통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밤낮없이 아이디어를 짜며 노력했던 개그맨들과 한없는 박수와 웃음을 주셨던 시청자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다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한다'며 따끔하게 꼬집었다.
900회 특집에 초대받지 못했던 것은 정종철뿐이 아니다. 임혁필은 정종철의 SNS 글에 '이런 게 하루 이틀이냐. '개그콘서트'와 아무 상관 없는 유재석만 나오고'라는 답글을 달아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이 밖에도 박준형·심현섭 등 '개그콘서트'의 일등공신들이 900회 특집에선 외면받았다.
제작진 갑질 의혹
정종철이 불만을 표한 것은 결국 코미디언들을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제작진의 태도 탓으로 보인다. 그는 "선배들과 나를 포함한 후배들은 '개그콘서트'를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란 거 말씀드리고 싶다. 개그맨들도 연예인이며 '개그콘서트'를 만들어 가는 기둥이다"며 "제작진들, 맥을 한참 잘못 짚는다. '개그콘서트' 출신 개그맨들이 왜 '웃찾사'(SBS)를 가고 '코미디 빅리그'(tvN)를 가는지 깊게 생각하길 바란다. '개그콘서트'를 지키는 개그맨들은 티슈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출연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티슈처럼 뽑아 쓰고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제작진의 행태를 정조준했다.
출연자에 대한 배려 없이 마치 '개그콘서트'의 소유물처럼 여기던 행태는 사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게 방송 관계자들의 평가다. 출연진은 '개그콘서트'에만 집중하길 강요당한다. 일부 고참 출연진을 제외하곤 일주일 내내 아이디어 회의에 참여하고 하루 녹화를 위해 모든 스케줄을 빼 둬야 한다. 타사의 버라이어티 예능에서 섭외가 오더라도 출연 결정권자는 '개그콘서트' 제작진이다. 실제로 과거 여럿 출연진은 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개그콘서트'에서 반강제적으로 하차해야만 했다. 업계에선 익히 잘 알려진 '개그콘서트' 제작진의 갑질이다. '개그콘서트' 출연 경험이 있는 한 코미디언의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제작진이 절대 갑이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스케줄을 잡을 수 없다. 최근 메인 PD를 비롯한 제작진 교체와 함께 이러한 강압적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고는 하나, 19년 동안 이어 온 '개그콘서트'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는 일"이라고 귀띔했다.
'개콘'의 부진과 제작진 일방통행
현재 '개그콘서트'의 부진도 이러한 제작진의 강압적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출연자는 한 회의 녹화를 위해 머리를 짜내어 아이디어를 내지만 결국 제작진의 눈에 들지 못하면 무대에 올릴 수 없다. 무대에 올리고 못 올리고는 제작진의 '감'에 달렸다. 일부 출연자들은 "제작진이 아이디어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 선택받지 못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 '개그콘서트'를 향한 혹평과 시청률 부진이 전적으로 출연진의 탓은 아니라는 항변이다.
이뿐이 아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A가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일방적으로 A가 하차를 통보받고 다른 코미디언이 코너를 맡기도 한다. 아이디어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누가 '개그콘서트'를 향한 애정을 갖겠나"고 토로했다.
정종철이 제기한 문제점과 드디어 터져 나온 내부의 불평에 제작진은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KBS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