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역 앞 고가도로가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개방됐다. 1970년에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도로가 2017년에 17개의 보행로로 연결된다는 의미로 '서울로 7017'이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많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로 7017'을 찾은 첫날 나도 서울로를 걸어 봤다.
서울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망은 역시 과거 서울역 역사건물이었다. 서울역은 일제 강점기에 남대문역에서 시작됐다. 1919년 9월 서울역에서는 강우규 열사가 사이토 총리에게 폭탄을 투하해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폭탄은 사이토 총리를 저격하지는 못했지만 일본 군 관계자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본의 도쿄역, 중국의 선양역과 쌍둥이처럼 닮은 서울역은 오랫동안 서울의 상징이었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서울역은 1958년 봄이다. 저녁에 서울역에 도착해 광장으로 나가자 거대한 세 개의 간판이 나를 맞아 줬다. '아이디어 미싱' '드레스 미싱' '오리온 제과' 광고 간판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서울역에 '빽'이 생겼다. 인사동에서 살던 시절 잘 아는 이웃집 누님이 서울역에서 근무했다. 나보다 네 살 위인 누님은 얼굴이 까만 편이라 자주 놀리곤 했는데 서울역에서 일하고부터 180도 달라졌다. 기차표 안내소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누님은 동네에서 만난 그 누님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역 안에는 고급 식당들이 많았다. 서울역에 누님을 만나러 가면 비싼 경양식 식당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옛날에는 기차표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는 선생님이 고향으로 내려 가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며 안타까워할 때 누님에게 연락해 기차표를 구한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중학생인 네가 어떻게 기차표를 구했어?"라고 말씀하시며 얼마나 고마워하셨는지 모른다.
서울역은 인간 군상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서울역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막 상경한 젊은 청춘들에게 나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역으로 전국 각지의 기차가 도착해서였을까. 어린 나이였지만 팔도의 사투리들을 모두 들을 수 있는 서울역에서 인생의 단면을 배울 수 있었다.
다시 많은 인파에 섞여 서울로를 걸어가자 옛 세브란스병원 옆 단팥죽 집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간판도 없는 단팥죽 집을 늘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 지키고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단팥죽을 만들고 여학생이 주문을 받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 여학생을 보기 위해 단팥죽 가게에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내가 단팥죽 가게에 도착할 즈음이면 라디오 드라마 '행복의 탄생' 로그송이 들려 왔다. ‘웃으며 살아가는 또순~또순~’ 노래를 들으며 단팥죽을 먹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브란스병원도, 단팥죽 가게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얼마 전 서울역에서 일했던 그 누님이 후암선원을 찾아 왔다. 우리는 한동안 옛 시절을 얘기하며 신나게 웃었다. "누님이 사 준 오므라이스 진짜 맛있었어!" 그러자 누님은 "서울역도 많이 변했지.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아쉬워했다. 지금은 변해 버린 광화문 풍경처럼 서울역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