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이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지난 6월 세계적인 제약사 BMS 공장을 통째로 인수한 데 이어 이번에는 도시바 반도체 사업 인수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다른 대기업 오너들이 각종 악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글로벌 인수전서 연이어 성공
21일 도시바는 이사회를 열고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3국 연합' 컨소시엄을 도시바 반도체 사업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컨소시엄에는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을 비롯해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와 국책은행 일본정책투자은행, 한국의 SK하이닉스가 포함돼 있다.
이번 우선협상자 선정은 최 회장의 승부수가 통한 결과라는 평가다.
애초에 SK하이닉스는 인수전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1차 입찰에서 SK하이닉스가 제시한 금액은 경쟁자들에 비해 1조원이 적었고 자사의 반도체 핵심 기술이 한국이나 중국 등 인접국가에 유출되는 데 대한 일본 내 우려가 있기도 했다.
이에 최 회장은 인수 이후에 대한 우려를 줄이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바 경영진들을 만났다. 최 회장은 기업을 돈주고 산다는 개념이 아니라 더 나은 개념으로 인수하려고 한다는 자신의 뜻을 적극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연합은 도시바 경영진이 49% 수준의 지분을 차지하는 경영자매수(MBO) 방식 딜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 연합이 도시바 메모리 사업의 지분 절반 이상인 51%를 인수하되 나머지 49%는 현 경영진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기술 유출 우려와 인력 구조조정 등을 우려하는 경영진과 일본 정부를 설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SK는 바이오 산업에서도 글로벌 입지를 넓혔다.
지난 6월 SK의 100% 자회사인 SK바이오텍은 세계적인 제약사인 BMS의 아일랜드 생산시설을 통째로 인수했다. 국내 기업이 글로벌 제약사의 생산설비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서도 최 회장의 뚝심이 크게 작용했다. 최 회장이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고 장기적으로 투자가 필요한 바이오·제약 산업에 20년 이상 장기 투자를 해온 것이 인수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SK의 글로벌 행보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SK는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17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며 이 중 4조9000억원을 전략적 투자에 쏟아부을 예정이다. 앞서 오너 부재에 따른 리스크로 정체된 사업 확장을 공격적으로 해 나간다는 것이다.
오너 중 숱한 위기 가장 먼저 극복
SK가 거침없는 행보를 나설 수 있는 이유는 최 회장이 여러 악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최 회장은 지난 2015년 8월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아 수감 2년7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출소한 그해 12월 최 회장은 불륜으로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최 회장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불륜 사건이 잠잠해질 때쯤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등장했다. SK를 비롯한 다수의 대기업들은 자사 현안 해결을 대가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씨에 대가성 뇌물을 건넸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SK는 최 회장의 사면을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4월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최종 수사 결과에서 최 회장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당시 함께 조사를 받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불구속 기소됐다는 점과 대조된다. 신 회장은 기소 이후 박 전 대통령과 최씨와 함께 나란히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현재 구속 수감된 지 4개월이 넘어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도 크게 비교된다. 이 부회장은 유일하게 대기업 오너 중 구속 기소된 채 재판을 받고 있다.
최 회장은 22일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과 관련해 청와대의 압박과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이번 재판에서 확실한 선긋기가 가장 중요할 것"이라며 "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이미 무죄 판정을 받은 만큼 SK는 위기 없이 당분간 안정적인 성장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