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화려한 스타의 길도 걸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비주전 인생'을 살고 있다.
박주영(32·FC 서울)의 얘기다. 청소년대표팀 시절 '천재'로 불리며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2005년 서울 입단과 함께 K리그에 '박주영 붐'을 일으켰다. 2008년 AS모나코(프랑스)로 이적하며 유럽의 품에 안겼고, 2010 남아공 월드컵 원정 16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2011년 아스널(잉글랜드)로 이적하면서 하락세를 겪었다. 이후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2015년 서울로 돌아왔다.
많은 기대감을 받았지만 강렬했던 모습을 찾지 못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도 시달렸다. 평범한 공격수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들렸다.
서울 복귀 뒤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2017 시즌. 지금 박주영은 비주전 공격수다. 데얀(36)이라는 간판 뒤에 가려졌다.
그는 올 시즌 K리그 클래식(1부리그)과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FA컵 등 22경기에 출전했다. 선발로 나선 것은 10경기뿐이다. 리그만 따지만 17경기 출전 중 선발은 7경기에 불과하다.
총 출전시간은 1098분. 경기당 50분이 허락됐을 뿐이다.
그래도 그는 달라진 위상과 위치에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하며 자신이 맡은 책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2017 18라운드 서울과 전북 현대의 경기에서 박주영은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가 끝난 뒤 박주영을 만났다.
"팀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전북전은 중요했다. 승점 3점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또 강호를 꺾고 서울의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 소득이다."
결승골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팀을 가장 먼저 거론했다. 스타 박주영을 내려놓은지 오래다. 모든 초점은 팀에 맞춰져 있다.
박주영이 비주전으로 살아가는 '첫 번째 방법'이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박주영이 비주전으로 사는 '두 번째 방법'은 주어진 시간에 모든 것을 걸고 뛰는 것이다.
자신에게 많은 시간이 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법에 익숙해 졌다. 그라운드로 들어서면 체력 안배 따윈 하지 않는다.
박주영은 "전북전에 오랜만에 선발로 나왔다. 오래 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45분에서 50분, 많으면 60분 정도를 생각했다"며 "내가 그라운드에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전반전부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털어놨다.
박주영은 언제 교체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악착같이 달렸고, 예상과 달리 90분 풀타임이 주어졌다. 경기가 끝나자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세 번째 방법'은 꾸준히 최고의 활약을 하지 못한다면 중요한 경기에서 만큼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전북전은 서울의 운명이 걸린 경기였다. 이전까지 서울은 3경기 연속 무승(2무1패)과 홈 4경기 연속 무승(2무2패)의 부진을 겪고 있었다. 전북전 패배는 곧 서울의 추락을 의미했다. 이 중대한 경기에서 박주영은 극장골로 서울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의 가치는 환하게 빛났다.
박주영은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어려운 시기에 팀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며 "지금까지 팀에 도움이 되는 모습이 부족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앞으로 좋은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했다.
팀 후배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능력은 경기 출전수와 상관이 없다.
벤치에 있더라도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베테랑 선수들이 많다. 박주영이 서울에서 그런 존재다. 박주영은 경기에 뛰지 못해도 후배들을 리드하고 있다. 그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리더십은 서울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만든다. 박주영이 서울 부주장을 맡은 이유다.
황선홍(49) 서울 감독은 "박주영이 베테랑으로 팀 후배들을 잘 이끌어 준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항상 말한다.
박주영의 '마지막 방법'이다.
박주영은 "주장 (곽)태휘 형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힘을 내고 있다. 나 역시 베테랑으로 태휘 형을 옆에서 최대한 도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며 "훈련장에서도 경기장에서도 후배들은 잘해 내고 있다. 충분히 반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후배들을 믿었다.
전북전이 끝난 뒤 서울 한 관계자는 "최근 박주영의 몸상태가 너무 좋다. 감각도 살아나고 있다"며 "전북전에서는 이명주에게 포커스가 맞춰졌지만 내가 볼 때 최고의 움직임은 박주영이었다. 다음 경기가 기대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박주영이 비주전 인생을 끝내고 다시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는 의미다. 시즌은 길고 경기는 많다. 전북전 같은 모습이 이어진다면 박주영이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