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드에서 아무리 잘 던진다 해도 팀이 점수를 뽑지 못하면 '패전'을 면하는 데 그칠 뿐이다. 타선의 득점 지원과 야수들의 탄탄한 수비가 뒤따라야 한다. 또 강한 불펜이 리드 상황을 지켜 줘야 한다.
SK 외국인 투수 메릴 켈리가 지난해 '켈크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유 역시 수차례 호투를 하고도 승 수를 추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에게 '켈리'와 '크라이(Cry·울다)'의 합성어인 '켈크라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올 시즌 KBO 리그에도 유독 승운이 없는 투수가 많다. kt 라이언 피어밴드(32)가 대표적이다. 피어밴드는 29일까지 평균자책점 2.78로 이 부문 1위에 올라 있다. 리그에서 유일하게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승 성적표는 초라하다. 평균자책점 10걸 중 승리가 가장 적다. 8승9패. 6월 3일 롯데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7승을 거둔 뒤 8승을 올리기까지 85일이 걸렸다.
이 기간 승리를 쌓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피어밴드가 못 던진 게 아니다. 7승과 8승 사이의 13차례 등판에서 8차례나 퀄리티스타트(QS·6이닝 이상 3자책 이하)를 기록했다. 지난 27일 삼성과 경기에서 8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뒤에야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령탑의 마음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김진욱 kt 감독은 "피어밴드가 승 수가 적은 것에 대해 겉으로는 괜찮은 척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며 "평균자책점 타이틀이라도 따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작 피어밴드는 "승운이 안 따라 줘도 승리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비록 승리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내가 퀄리티스타트를 달성한 경기에서 팀이 이긴 적이 있어 만족한다"고 의연해했다.
올 시즌 팀의 1선발로 기대를 모았던 팀 동료 돈 로치(28) 역시 마찬가지다. 올 시즌 22차례 등판에서 평균자책점 4.95를 기록하고 있는 로치는 리그에서 패전이 가장 많은 투수다. 벌써 13패를 당했다. 반면 승리는 두 번밖에 없다. 4월 19일 KIA전(7이닝 1실점) 이후 4개월 넘게 승리 소식이 없다.
남은 등판에서도 승리 대신 패전만 쌓는다면 불명예 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로치는 초반 2연승 이후 내리 13경기에서 패전투수가 됐다. KBO 리그 역대 개인 최다 연패는 1986년 장명부가 기록한 15연패다. 1983년 다승왕(30승)에 오른 장명부는 1985년 11승25패, 평균자책점 5.30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로치와 마찬가지로 삼성 재크 페트릭(28)도 아직까지 2승에 불과하다. 그는 올 시즌 가장 불운한 외국인 투수 중 한 명이다. 20차례의 등판에서 정확히 절반인 10번 QS를 달성했다. 그나마 QS를 달성한 경기에서 2승을 거뒀다. 나머지 8차례의 QS 경기에선 패전이 3차례, 노 디시전이 5차례였다. 심지어 올 시즌 4경기당 3번꼴로 상대 외국인 투수와 맞대결을 했다. 이 역시 페트릭이 불운한 이유 중 한 가지다.
페트릭은 1승에 그쳤던 5월 말 "마운드에서 계속 던질 수 있어 행복하다. 실망하지도 않는다"며 "득점이 적으면 내가 실점을 더 적게 하면서 막아 줘야 한다.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깔끔하게 막고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팀에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승 수 쌓기가 여의치 않자 내심 아쉬웠던 듯하다. 부상에서 돌아온 최근에는 "선발투수로서 항상 퀄리티스타트가 최우선 목표다. 팀 승리에 발판을 놓고 싶다"면서도 "아직 2승밖에 없어서 조금 더 승리를 쌓고 싶다"고 바람을 이야기했다.
지난해 말 LG와 96억원에 FA 계약을 맺고 이적한 차우찬(30)도 승운이 별로 없는 편이다. 올 시즌 8승6패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자책점(3.24)에 비하면 승리가 적다. NC 에릭 해커(11승5패·3.26), KIA 헥터 노에시(17승3패·3.38), KIA 양현종(17승5패·3.53), SK 켈리(13승5패·3.54) 등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굳이 멀리서 찾지 않고 가까이 있는 팀 동료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인 LG 류제국(4.87)이 차우찬과 같은 8승을 올렸다.
롯데 박세웅(22)은 데뷔 3년 차를 맞아 올 시즌 리그를 대표하는 차세대 에이스로 성장했다. 평균자책점은 3.06으로 리그 2위다. QS 17회로 국내 투수 가운데 두 번째로 많다. 그러나 칠전팔기 끝에 어렵사리 개인 첫 10승을 달성했다. 지난 6월 25일 두산전에서 시즌 9승을 올린 뒤 두 달 가까이 흐른 8월 13일 삼성전에서야 10승 고지를 밟았다. 평균자책점 4.78의 kt 고영표(26) 역시 피어밴드와 마찬가지로 85일 동안 승리가 없는 불운을 경험했다.
올 시즌 승운이 없는 투수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다. 득점 지원이 적었다. kt의 '원투스리펀치' 로치, 고영표, 피어밴드는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가운데 득점 지원 최소 1~3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선발투수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 얻은 득점 지원은 로치가 1.95점, 고영표가 2.43점, 피어밴드가 2.52점에 불과하다. 규정 이닝에 조금 모자란 페트릭은 고작 1.90점밖에 안 된다. 그 외에 차우찬과 박세웅도 리그 평균(3.85)보다 적은 득점 지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