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끝에 건넨 한마디는 이진석(11)군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KBO 리그 정상급 외야수인 손아섭(29)과 눈을 마주치며 약속했다. 긴장감이 가득했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손아섭이 '야구 꿈나무' 이진석군과 만남을 통해 일일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일간스포츠와 조아제약㈜이 공동 제정한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은 지난해부터 저소득층 유소년 선수 및 야구 재단을 후원하는 '야구에게 희망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월간 MVP 수상 선수의 이름으로 매월 유소년 야구선수에게 100만원을 지원한다.
한 달 동안 타율 0.368 9홈런 24타점 33득점을 기록한 손아섭이 8월 MVP로 선정됐다. 지난 5월 MVP 박세웅에 이어 롯데 선수로는 올 시즌 두 번째로 뜻깊은 일에 동참했다. 손아섭의 이름으로 유소년 야구 클럽 '레인보우 카운트' 소속 이진석군에게 장학금이 전달된다. 이 클럽은 롯데 레전드 출신 박정태 이사장이 운영하는 '레인보우 희망재단' 소속이다. 손아섭은 올 시즌을 앞두고 클럽 선수들을 위해 일일 코치로 나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손아섭은 15일 사직구장에서 이군을 만났다. 처음엔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줄 위치가 아니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정작 이군을 만난 뒤엔 진심 어린 말을 쏟아 냈다.
수줍어하던 이군이 이내 "머리 뒤로 오는 타구를 어떻게 해야 잘 잡을 수 있냐"는 질문을 꺼냈다. 이군은 소속팀에서 주전 중견수다. 손아섭은 "그런 타구는 프로 선수들도 잡기 어렵다. 나도 수비가 좋은 선수가 아니다"라고 웃더니 이내 자신의 노하우를 전해 줬다.
"수비 훈련인 펑고(야수가 수비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배트로 쳐 준 타구)보다는 프리 배팅을 하는 타자의 타구를 반복해서 잡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펑고는 자신에게 향하는 타구를 기다리는 수비다. 반면 타자들의 프리 배팅은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손아섭은 "위치를 예측할 수 없는 타구를 맞이해야만 최초 타구 방향과 속도를 파악하는 판단력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굳은살이 생겨 버린 손바닥 때문에 고민인 이군에게 효율적인 훈련 방식을 강조하기도 했다. 손아섭은 "아픈 상태로 배트를 돌리면 무의식적으로 통증을 완화하려는 자세가 나온다. 안 좋은 습관이 생길 수 있다"며 "스윙을 한 번 하더라도 확실한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칠 때 정타가 나오고 타구를 멀리 보낼 수 있는지 되새기면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아섭은 '꾸준함'을 운동 선수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 꼽았다. 실제로 모든 여력을 경기에 집중하고 매일 루틴대로 하루를 보낸다. "누군가의 눈에는 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힘든 일이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군에겐 "스윙 100개 하고 3~4일을 쉬는 것보다 10개를 하더라도 매일 해야 한다"며 눈높이에 맞는 지침을 강조했다.
힘든 시기를 이겨 내는 마음가짐도 전수했다. 손아섭은 "프로에 데뷔한 뒤엔 한 번도 야구가 싫어진 시기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한 번씩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손아섭은 "사춘기를 겪다 보면 놀고 싶은 유혹에 빠질 거다. 그래서 야구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결연한 각오도 갖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전국에 수많은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 똑같이 훈련해선 안 된다"며 "다른 선수가 텔레비전을 볼 때 스윙을 하고, 스윙을 할 때는 더 좋은 스윙을 연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군의 눈은 시종일관 손아섭에게 고정됐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 깊게 들었다. 두 손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손아섭이 "힘이 없으면 투수의 스윙에 밀릴 수밖에 없다"며 마른 몸을 걱정하자 "많이 먹고 있다"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이군은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다. 손가락도 길다.
손아섭과 이군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약속 장소는 그라운드다. 손아섭은 "나는 15년을 더 현역 선수로 뛸 거다. 네가 프로 무대에 올 때면 선후배 관계가 될 수 있다. 꼭 만나자"며 웃었다. 이군도 "네"라며 짧고 다부지게 대답했다. 이후 이군은 경기 전 진행된 손아섭의 월간 MVP 시상식에 시상자로 나섰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악수를 나눴다. 언젠간 같은 그라운드에 서는 날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손아섭은 "나는 학창 시절엔 프로 선수들을 만나 보지 못했다. 진석이가 프로에 오면 오늘 만남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흐뭇해 했다. 이어 "지도자보다는 선배로 다시 만나고 싶다. 더 열심히 야구를 하고 몸 관리를 해야 할 이유가 늘어난 것 같다"며 뜻깊은 만남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군도 "정말 많은 말씀을 해 주셔서 놀랐다.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며 웃었다. 경기에 나선 손아섭은 KIA 선발투수 임기영을 상대로 첫 타석에서 좌전 2루타를 쳤다. 이군에게 끝까지 잊지 못할 하루를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