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기훈(34·수원 삼성)에게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두 가지 별명이 있다. 왼발을 워낙 잘 쓴다 해서 '왼발의 마술사'고, 그 왼발에 실망한 사람들이 붙여 준 또 다른 별명이 '왼발의 맙소사'다.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때는 2010년, 허정무(62) 감독이 이끌던 한국 축구대표팀은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2차전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 리오넬 메시(31·바르셀로나)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만났다. 앞서 열린 1차전에서 그리스를 2-0으로 꺾으며 상승세를 타고 있던 허정무호는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까지 꺾어 보겠다는 각오로 그라운드에 나섰다. 아르헨티나는 역시 강했고, 한국은 자책골에 추가골까지 내주며 0-2로 끌려갔다. 다행히 전반 종료 직전에 이청용(29·크리스탈 팰리스)이 추격의 불씨를 지피는 만회골을 터뜨리며 1-2가 됐다. 후반 13분. 염기훈이 골키퍼와 1 대 1 상황에 맞닥뜨렸다. 절호의 득점 기회. 골이 들어간다면 2-2 동점, 역전승까지 노려 볼 수 있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염기훈의 슈팅은 골대를 외면했다. 한국에 찾아온 기회도 물거품이 됐다. 한국은 두 골을 더 내주며 1-4로 완패했다. '왼발의 마술사'는 '왼발의 맙소사'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었다. 그 별명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태극마크를 달 기회도 줄어들었고, 설령 달았다 해도 팬들은 그를 '왼발의 맙소사'라며 비웃을 뿐이었다.
여론이 뒤바뀐 건 지난 9월에 끝난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10차전 우즈베키스탄전 이후다. 울리 슈틸리케(63) 전 감독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신태용(47) 감독은 한 번만 패해도 월드컵 본선 진출이 무산될 위기 상황에서 과감하게 염기훈(수원 삼성), 이동국(38·전북 현대) 등 베테랑들을 불러들였다.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베테랑들은 신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염기훈은 우즈베키스탄전 후반 19분에 교체 투입돼 답답했던 경기력에 활기를 더하며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K리그가 아닌 대표팀에서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염기훈에게는 우즈베키스탄전이, 그리고 신태용호가 각별하다.
"솔직히 나도 사람인데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내 입으로 다시 꺼내기는 좀 그렇지만, 2010년에는 정말 힘들었거든요." '왼발의 맙소사' 시절을 되새기며 염기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로 간간이 대표팀에 이름이 불리긴 했지만 여전히 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염기훈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 하나에도 악성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즈베키스탄전 이후 달라진 여론에 염기훈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오죽하면 11월 A매치 2연전에 발탁됐을 때, 그의 아내가 "오빠, 대표팀에 안 갔으면 좋겠다. 겨우 칭찬받게 됐는데 여기서 좋은 모습으로 끝냈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
염기훈은 "나는 당연히 대표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것 때문에 (이)근호도 아내랑 싸웠다고 하더라. 지켜보는 가족들 마음은 또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염기훈은 "아직도 욕먹고 있지만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도 생겼다. 그런 분들이 다시 생기기까지 7년이 걸린 셈"이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덕분에 지금 비난을 받고 있는 후배들에게 "대표팀에 오는 이상 욕을 안 먹을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면 좋아진다"며 "욕먹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독여 줄 수도 있게 됐다.
그 말을 증명하듯 염기훈은 요즘 다시 '국가대표'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11월 A매치 2연전에도 대표팀 명단에 소집돼 경기에 나섰고, 다음 달 일본에서 열리는 2017 EAFF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 명단에도 들었다. 이대로라면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무대 출전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남아공월드컵 이후, 대표팀에 소집됐을 때마다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지만 번번이 명단에서 제외됐던 과거를 생각하면 커다란 변화다.
"솔직히 신태용 감독님이 오시기 전까지 대표팀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뽑겠다는 신 감독님의 말이 커다란 동기부여가 됐다. 축구 인생에 반환점을 다시 주신 것 같다"며 "밋밋하게 지낼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대표팀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이어 "무조건 이번이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뛰는 만큼 간절함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전에 다녀와서 자신감이 생겼고, 잘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며 월드컵 무대에 대한 욕심도 숨김 없이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