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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663. 무소유의 참뜻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는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법정스님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지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무소유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알려 주고 2010년에 입적했다.
그런데 무소유를 가져야 하는 것을 갖지 않음으로써 느껴지는 텅 빈 충만함에서 오는 자부심쯤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본래 무소유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버린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원래 가진 게 없다. 그저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돈·명예·가족·지위는 모두 허상일 뿐, 실제 가진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재벌이 꿈속에서 노숙자가 됐다면 그 순간은 노숙자가 맞다. 반대로 노숙자가 재벌 회장이 되는 꿈을 꿨다면 꿈에서는 회장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꿈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수래공수거, 즉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말 역시 ‘무소유’와 함께 잘못 이해될 소지가 있다. 공수래공수거도, 무소유도 처음부터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본디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만약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오도·깨달음을 이뤘다면 달라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본체를 알기 때문에 무소유를 할 수 있다. 자신의 본체를 확실히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본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속된 말로 ‘뻥’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무소유의 ‘소유’는 깨달음이다. 어떤 각을 이룬 사람이 그것을 버릴 때 비로소 무소유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의 종교는 점점 권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종교의 기본은 ‘평화’, 즉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는 종교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폭력·전쟁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종교의 축이 되는 깨달은 사람들이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들은 깨달은 순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라고 했다. 이는 깨달음과 동시에 부처·나한·보살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해 준다. 그것이 진정한 무소유다.
한낱 범부중생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 가졌다고 착각하고 그 착각 속에서 무엇인가 버려야 하기에 번뇌가 일어난다.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두 빈손으로 떠난다. 재산도 가족도 종국에는 다 버리고 떠나야 한다. 그러기에 범부중생은 원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
옛날 어느 사찰의 주지 스님에게 아끼는 도자기가 있었다. 어느 날 상좌승이 실수로 주지 스님의 도자기를 깨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다. 상좌승은 스님 앞에 석고대죄했다. “평소에 애정하시는 도자기를 깼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명색이 도를 닦는 사람인데 한낱 도자기에 집착했구나. 귀하건 귀하지 않건, 도자기는 도자기일 뿐이다. 내 집착을 깨 주었느니 고맙다.” 반대로 난초를 키우던 스님이 있었다.
태풍이 불어 온실이 파괴되자 가족, 친지가 죽은 것보다 더 비통해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가족까지 버리고 출가하신 분이 왜 난초에 그다지도 집착하시는 걸까. 결국 무소유란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버릴 때 무소유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범부중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원래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소유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하루빨리 가졌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뿐이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