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위기 속에 한국과 북한·미국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한과 미국 입양아 출신 선수가 얼음 위를 달리며 호흡을 맞췄다. 평창올림픽에 출전하는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4일 인천 선학링크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평가전에서 보여 준 장면이다.
올림픽 최초로 결성된 남북한 단일팀 선수들은 ‘KOREA’와 한반도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왔다. 단일팀은 미국 브랜드 나이키가 아닌 핀란드 테클라가 제작한 짙은 파란색 유니폼을 입었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대북제재를 의식한 조치로 보였다. 경기 전 애국가 대신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북 선수 4명 출전 … 남측은 5명 빠져
이날 2900석의 관중석은 꽉 들어찼다. 남북 공동응원단은 이날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며 단일팀을 응원했다.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엔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100명이 넘는 기자가 참석했다.
경기 전 단일팀 선수들은 둥글게 모였다. 주장 박종아가 스틱으로 빙판을 치면서 “어이! 어이! 어이! 팀 코리아!”를 선창하면 남북 선수들이 함께 따라 했다.
이날 단일팀 2라인 구성은 파격적이었다. 한국의 한수진·이은지·김세린과 함께 북한 레프트윙 정수현(22)과 미국 가정에 입양됐다가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국적을 회복한 수비수 박윤정(26·영어명 마리사 블랜트)이 호흡을 맞췄다. 남북한과 미국 출신 ‘얼음공주’가 같은 조에서 빙판을 누빈 것이다.
정수현은 지난해 4월 강릉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5경기에 나와 2골-2도움을 기록한 북한의 에이스다. 1992년 한국에서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던 박윤정은 2년 전 한국 국적을 회복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미국의 양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동생 한나는 미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로 평창올림픽에 출전한다.
올림픽 단일팀 엔트리는 총 35명(한국 23명, 북한 12명)이지만 경기에 뛸 수 있는 게임엔트리는 22명뿐이다. 남북한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매 경기 북한 선수를 최소 3명 이상 기용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이날 벤치에는 한국 선수 18명과 북한 선수 4명(공격수 3명)이 나란히 앉았다. 한국 선수 5명은 벤치에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아이스하키는 게임엔트리 22명 중 20명의 필드플레이어(골리 2명 제외)가 5명씩(공격수 3명, 수비수 2명) 1개 조를 이뤄 4개 조가 번갈아 투입된다. 1라인과 2라인은 득점력이 좋은 주력 라인이고, 3라인과 4라인은 보통 수비에 무게를 둬 출전시간이 상대적으로 적다.
지난달 25일 단일팀이 처음 구성될 때만 해도 세라 머리(30·캐나다) 감독은 북한 선수들을 4라인에만 기용할 것으로 보였다. 북한은 지난해 한국에 0-3으로 완패했다.
“급조됐는데 전력 나쁘지 않아” 평가
하지만 머리 감독은 이날 2~4라인에도 북한 선수들을 전격 투입했다. 3라인에는 북한 공격수 여송희가 포함됐고, 4라인에는 북한 공격수 김은향과 수비수 황충금이 캐나다에서 귀화한 대넬 임과 호흡을 맞췄다. 단 1라인은 한국 에이스 박종아 등 한국 선수들로만 구성됐다.
한국의 세계랭킹은 22위, 북한은 25위다. 이날 맞붙은 스웨덴은 세계 5위의 강팀이었다. 단일팀은 1피리어드에 3실점했다. 단일팀은 0-2로 뒤진 1피리어드 18분15초에 박종아가 박채린의 패스를 받아 드리블 돌파 이후 골문 반대편 모서리로 강한 슛을 쏴 만회골을 터트렸다. 하지만 1피리어드 종료 직전 추가 실점했다.
단일팀은 2피리어드에서 유효슈팅 2-13으로 밀렸지만 실점하지 않았다. 3피리어드 막판에는 오히려 스웨덴을 몰아붙였다. 단일팀은 이날 1-3(1-3, 0-0, 0-0)으로 졌다. 국내 아이스하키계 관계자는 “올림픽을 3주 앞두고 급조된 팀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송동환 KBS 해설위원은 “스웨덴 올림픽 정예 멤버를 상대로 생각보다 잘 막았다”면서도 “북한 선수들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북한 선수 4명 중 정수현을 빼고는 활약이 미미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정수현은 “우리 북과 남 선수들이 달리고 또 달리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철호 감독과 정수현은 질문을 받지 않고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머리 감독은 “지난 몇 년간 함께 훈련한 선수들과 올림픽에 나가지 못해 속상하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며 “올림픽을 10여 일 앞두고 북한 선수들이 합류했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특히 정수현은 터프하고 경기를 읽는 눈도 좋아 앞으로 2라인으로 계속 기용하겠다”고 말했다.
머리 “북 선수, 배우려는 의지 강해”
한편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인천 선학링크 일대는 보수와 진보 양측의 시위장으로 변했다. 한쪽에선 보수단체가 단일팀 반대시위를 열었고, 또 다른 쪽에서는 북한 선수들을 환영하는 ‘반갑습니다’ 노래가 흘러나왔다. 양측은 도로를 두고 갈라서 한쪽에선 “평양올림픽”을, 반대쪽에선 “평화올림픽”을 외쳤다.
경찰의 통제로 물리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경쟁하듯 앰프 소리를 높인 탓에 근처를 지나는 행인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서울에서 온 박모씨는 “인공기는 되면서 태극기는 안 되고, 애국가는 부르지 못하는데 아리랑을 부르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이모씨는 “단일팀이 평화의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단일팀은 곧바로 강릉선수촌으로 이동한다. 머리 감독은 “선수촌이 따로 구분돼 있어 북한 선수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들었다. 팀 미팅을 위해선 함께 지내는 게 좋은데 그렇게 할 수 없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