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시절 '컴퓨터 세터'로 불렸던 최태웅(42) 현대캐피탈은 지휘봉을 잡은 뒤 '정말로'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다.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컴퓨터로 영상 및 전력을 분석한다.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도 잦다. 컴퓨터 앞에 앉아 지독하리만치 전력을 분석하는 모습은 배구를 향한 그의 열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우승 감독'의 비결이기도 하다.
현대캐피탈은 2015년 봄, 파격적으로 감독을 선임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소속팀 현역 선수로 활약한 최태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최 감독은 현역 시절 세터상만 통산 7차례(프로 출범 전 2001~2003년, V리그 2005~2009시즌) 수상하는 등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낸 터. 기대감이 뒤따랐지만 코치 경력이 전무했기에 우려도 제기됐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최 감독은 단기간에 V리그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매 시즌 '우승'을 경험했다. 대한항공(2010~2011) 삼성화재(2011~2015)에 밀려 있던 '전통의 명문' 현대캐피탈은 최 감독 부임 첫 시즌인 2015~2016년 7년 만에 정규 시즌 우승을 달성했다. 최 감독은 '역대 최초 부임 첫 시즌 우승 감독' '최연소 정규 시즌 우승 감독' 'V리그 최초 선수·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한 지도자' 타이틀을 달았다. 2015~2016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OK저축은행에 패한 아쉬움은 2016~2017시즌 대한항공을 꺾고 우승하며 조금이나마 달랬다. 올해 역시 정규 시즌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했다. 그는 "매 시즌 우승까지 험난하고 힘들었다. 올 시즌 역시 우승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선수들이 '어렵다'는 예상을 극복하고 우승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강했던 것 같다"며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최 감독에게는 남다르고 특별한 '전략 무기'가 있다. 컴퓨터를 활용한 전력 분석이다. 직접 경기 영상을 찾아보고 상대의 전력을 분석하는 모습은 여느 감독보다 좀 더 특화돼 있다. 경기 중에도 뭔가를 들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바로 태블릿 PC와 직접 설계·제작까지 한 작전 지시 판이다. 여기에는 선수들과 관련된 각종 구체적인 데이터가 입력돼 있다. 최 감독은 "태블릿 PC에는 상대팀이 어느 코스로 공격을 잘하는지를 비롯해 각종 기록이 담겨 있다. 작전 지시 판은 비밀인데 직접 만든 각종 문서가 있다"고 귀띔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자료가 아니다. 밥 먹고, 훈련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다.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라고 한다. 오전에 3~4시간, 오후에 1시간, 저녁에 5시간 정도다. 영상 분석에 몰두하다 보면 밤을 꼬박 새우기도 일쑤다. 이렇게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최 감독은 "한참 영상을 보다 해가 뜰 때도 많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 수도 없지 않나"라며 웃었다.
그만큼 독하고, 배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열정이다. 최 감독은 2010년 여름 림프암 판정을 받고 '입원하라'는 담당 의사의 권유를 뿌리쳤다. 가족에게 암 발병 사실을 숨긴 채 코트에서 활약했던 적도 있다.
최 감독은 전력 분석을 위해 사비 1000만원을 들여 모니터가 6개 달린 컴퓨터를 구매했다. CPU(중앙처리장치)도 10개짜리(데카코어)다. V리그 영상뿐 아니라 전략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해외 리그 경기까지 본다. 최 감독은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분석에 열을 올리는 이유에 대해 "선수들을 도와줄 수 있는 건 내가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에 다 넣긴 힘들다"며 웃었다.
최 감독은 이런 열정과 노력에 대한 평가를 쑥스러워했다. 그는 "쉬는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휴식이 필요할 땐 쉬어야 집중력이 좋아지고, 가끔씩 일을 내려놔야 하는데 아직 그런 여유가 없다. 아직은 초보 감독인가 보다"라고 말했다.
솔직한 고백도 털어놨다. "가끔씩 맹목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영상을 볼 때도 있다. 나중에 '(컴퓨터 영상 분석이) 싫증 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든다. 다행히 아직은 젊어서인지 (체력 문제나 싫증 등) 전혀 문제가 없다"며 껄껄거렸다. 구단 관계자는 "감독님께서 기본적으로 많이 연구하고 노력한다. 2~3일에 걸쳐 분석한 중요한 점을 2~3분 안에 짧게 요약해서 선수들에게 설명해 주신다"고 귀띔했다.
현대캐피탈만의 색깔, '스피드 배구' '토털 배구' 역시 이렇게 탄생했다. 현대캐피탈은 한국 남자 배구의 숙제로 늘 꼽혀 온 외국인 선수 의존도를 낮추고, 리베로를 제외한 전원이 공격에 가담해 한 템포 빠른 배구를 하고 있다. 최 감독 체제 이후 현대캐피탈이 강팀으로 다시 올라선 원동력이다. 지휘봉을 잡은 3년 동안 외국인 선수 복이 없는 편이었다. 올해 역시 득점 부문 1~5위 모두 외국인 선수가 휩쓴 가운데, 현대캐피탈은 문성민(전체 7위)이 팀 내 득점 1위에 올라 있다. 안드레아스는 득점 10위다. 최 감독은 "현역 시절부터 영상을 많이 봤다. 내게는 큰 힘이 됐다. 감독이 된 뒤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배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팀의 승승장구에는 감독의 '포근한 지도력'도 한몫한다. 구단 관계자는 "선수들이 잘못해도 절대 혼내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 하며 설득하고 설명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이 더욱 잘 뭉치고 따른다"고 귀띔했다.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너희들 지금 10연승하는 팀이야. 10연승 자부심을 가지고 해" "여기 있는 모든 관중이 너희를 응원하고 있다. 그 힘을 받아 경기를 한번 뒤집어 보자" '최태웅 어록'이 이를 대변한다. 선수들을 꾸짖고 혼내기보다 심리적인 부분을 보듬어 주는 감성적인 말로 팀원들의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이다. 시즌 초반에 부진했던 안드레아스를 살린 것도 마음을 터놓고 따뜻한 조언을 나눈 덕분이다. 최 감독은 "선수들이 코트의 주인공이다. 코트 안에서 경기하는 데 제약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꺼낼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은 경기력으로 연결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게 열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배구를 정말 사랑하는 지도자다. 2016년에는 국가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사비를 털어 1000만원을 지원했고, 지난해 연말에는 배구 유망주에게 '최태웅 배구상'과 장학금을 전달했다. 지난해 비시즌에는 선수 부상 등을 꺼려 대표팀 선수 차출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최 감독은 문성민 신영석 노재욱 박주형 이시우 등 현대캐피탈 선수 7명을 대표팀에 보냈다. 이런 그의 열정에 감동한 최 감독의 열혈팬 신지원(90) 할머니는 배구 발전을 위해 써 달라며 최 감독에게 기부금 1억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시선은 이제 챔피언결정전으로 향한다. 2위 삼성화재나 3위 대한항공이 챔프전 상대다. 삼성화재와는 시즌 상대 전적 3승3패로 팽팽하고, 대한항공엔 후반기 9승1패로 상승세다. 최 감독은 "우리팀(현대캐피탈 22승11패·승점 69)이 삼성화재(22승12패·승점 61)와 대한항공(22승12패·승점 60)보다 승점 관리가 잘돼서 그렇지, 승패는 비슷하다. 챔프전은 백중세로 치러지지 않을까 싶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2년 전 사령탑에 부임한 첫 시즌에 아깝게 놓친 통합 우승을 이번만큼은 꼭 달성하겠다는 의지다. 그는 "2년 전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시행착오를 많이 줄여 철저하게 준비하겠다. '배구 특별시' 천안 홈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된다. 궂은 날씨에도 항상 경기장을 찾아 주셔서 뜨겁게 응원해 주시는 만큼 마지막까지 분발해 챔피언결정전에서 꼭 좋은 모습으로 보답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2015~2016 정규 시즌 우승, 2016~2017 챔피언결정전 우승 트로피를 원정에서 들어 올린 현대캐피탈은 오는 6일 한국전력전 종료 이후 처음으로 홈구장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정규 시즌 우승 시상식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