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오스카상 후보 오찬이 열리기 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주최 측에 이렇게 요청한 대상이 있었다. 이제 막 한 편의 장편 단독 연출작을 내놓은 신예 그레타 거윅(35)이다. 노아 바움백 감독과 공동으로 각본을 쓰고 자신이 주연한 ‘프란시스 하’(2012), 배우 아네트 배닝과 호흡을 맞춘 ‘우리의 20세기’(2016) 등 주로 독립·예술영화에서 작가이자 배우로 활동해왔다. 그가 이번엔 각본과 연출을 겸한 자전적 영화 ‘레이디 버드’로 골든글로브 2관왕(뮤지컬코미디작품상·여우주연상) 등 전 세계 100여개 영화상을 휩쓸었다. 오스카상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여성이 감독상 후보로 오른 건 오스카상 90년 역사상 다섯 번째에 불과하다. 또 극적인 일탈이나 묵직한 역사·사회적 이슈 없이, 평범한 10대 소녀의 성장담만으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 신인감독은 전례가 없다. 결국 오스카 수상은 불발됐지만, 거윅은 할리우드에 새 바람을 일으킬 혜성으로 급부상했다. 4일 국내에도 개봉하는 ‘레이디 버드’는 10대 여성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순진하거나 무모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은 미국 새크라멘토에 사는 17세 소녀(시얼샤 로넌 분). 본명 크리스틴 대신 자신이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러주길 바랄 만큼 개성 강하고 고집 센 성격이다. 그는 간호사인 엄마(로리 멧칼슨 분)의 잔소리와 따분한 가톨릭 고등학교를 벗어나 뉴욕의 대학에 가기만을 꿈꾼다. 그러나 첫사랑에 실패하고 인생의 쓴맛에 발버둥 치며 자신이 놓쳤던 소중한 것에 서서히 눈뜨게 된다. 여드름 분장이 어쩌면 이리도 실감 날까, 감탄할 만큼 사춘기 소녀의 반항기와 감수성을 섬세하게 새긴 레이디 버드의 표정부터 절묘하다. 야단 좀 쳤다고 레이디 버드가 달리는 차문을 벌컥 열고 뛰어내릴 땐 엄마 매리언의 부글부글 끓는 속이 십분 이해될 정도다. 영화엔 부모에 대한 반항, 학교생활, 첫사랑 등 10대를 거쳤던 누구든 공감할 만한 소재가 가득하지만 기존 하이틴 무비와 다르다.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던 소녀가 주위 가족과 친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받아들이며 바뀌는 여정을 유연하게 그려낸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러브라인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 있다. “소녀 성장담의 중심엔 한 소년이 있어야 마땅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성은 청소년시절 어머니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모녀지간은 가장 격정적인 로맨스 중 하나다.” 거윅의 설명이다. 실제 새크라멘토 출신으로, 어머니가 간호사인 거윅은 이 영화를 “떠나온 고향에 부치는 러브레터”라고 했다. ‘그린버그’(2010)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까지 세 편을 함께한 동료이자 연인 바움백 감독이 말한, “평범한 삶이 주는 기쁨을 바라보는 거윅의 낭만적인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도 빛난다. 거윅의 매력은 자연스레 사람을 끄는 천진함과 씩씩함, 유머를 잃지 않는 낙천성으로 요약된다. 거윅은 이를 무기로 작가이자 배우로서 ‘인디영화계의 연인(Indie Darling)’이라 불리운 시절부터 ‘레이디 버드’로 메이저 스튜디오가 주목하는 차세대 감독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도전했다.
중산층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엔 발레리나를 꿈꿨으나 자랄수록 체격이 건장해지자 발레를 포기했다. 이후 현대무용을 배우고 힙합 그룹에 들어가면서 그는 “갈대처럼 마르거나 백합같이 청초할 필요 없는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돌이켰다. 뉴욕 버나드대에 진학해 영어와 철학을 전공하며 작가를 꿈꿨지만, 지원한 모든 대학원의 극작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는다. 전화위복이 돼준 게 영화다. 친구인 조 스완버그 감독의 초저예산 영화 ‘LOL’(2006)에 출연한 걸 계기로 저예산영화 여러 편을 각본·연출·주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상업영화 문턱에서 특색 없는 조연을 도맡았던 시절 그를 붙들어준 출세작이 바움백 감독과 함께한 ‘프란시스 하’다. 뉴욕의 철부지 발레 댄서로 분한 이 흑백영화로 그는 유수 영화제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 극찬받으며 전 세계에 얼굴을 알렸다. 이후 재클린 케네디의 비서 낸시 터커맨을 연기한 ‘재키’(2016),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아일 오브독스’의 목소리 출연을 맡으며 영화계에서 입지를 키워왔다. 지난달 미국 타임지는 그를 표지 인물로 내세우며 “그레타 거윅은 어떻게 할리우드 여성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나”라는 제목을 달았다. 최근 거윅은 우디 앨런 감독의 수양딸 딜런 패로 성추행 사실이 밝혀진 후 “우디 앨런 영화(‘로마 위드 러브’)에 출연한 걸 후회한다”고 공식 발언하는 등 ‘미투’ 운동에도 힘을 싣고 있다. 할리우드에선 거윅의 차기 감독작이 블록버스터 장르물이 될지 모른다는 예측도 나온다. 패티 젠킨스 감독의 ‘원더 우먼’(2017)처럼 여성 감독이 연출한 제작비 1억 달러 이상 대작이 조금씩 늘어나는 분위기 속에서 가능성 있는 얘기다. 분명한 건 영화계가 새로운 여성 롤모델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할리우드 영화는 조금 더 다양해질 기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