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큰 별이 졌다. 원로배우 최은희가 92년을 일기로 지난 16일 별세했다. 92년의 세월은 그가 평생을 바쳐온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3년 극단 '아랑'에 발을 들이며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21살이 되던 해인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데뷔했다. 당시 만난 김학성 촬영감독과 결혼했다. 이후 '밤의 태양'과 '마음의 고향' 등에 출연하면서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배우 최은희의 발목을 잡았다. 전쟁 동안 위문공연을 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과 이혼하고 신상옥 감독과 새롭게 인연을 맺었다. 영화 '코리아'를 통해 신 감독과 만나서 이후 23년간 130여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출연했다. 최은희가 남긴 대부분의 명작들이 바로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이 이들의 영화다. 고인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지금의 대종상인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0~60년대 최은희는 김지미, 엄앵란과 영화계를 삼등분했다. 당시 그는 신상옥 감독의 작품 '성춘향'으로 홍성기 감독이 아내 김지미와 찍은 '춘향전'과 경쟁을 벌였다. 이는 춘향 대결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고, 최은희의 '성춘향'이 더 많은 관객을 모았다.
최은희는 1965년 대한민국 3번째 여성 감독으로도 한국 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신상옥 감독과 이혼하고, 1967년부터는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일은 1978년 일어났다.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북됐던 것. 같은 해 신상옥 감독 또한 납북되며 두 사람은 북한에서 재회했다. 이들은 북한 영화산업의 발전을 꿈꾸던 김정일의 요청으로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최은희는 1985년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 한국인으로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새 역사를 썼다. 이후 1983년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거치다 1999년 영구 귀국했다.
1999년 귀국 후 노령에도 최은희는 끊임없이 영화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안양신필름예술센터 학장, 동아방송대 석좌교수,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명예교수를 맡으며 후배를 양성했다. 지난 2003년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신상옥 감독을 대신해 공로상을 수상한 최은희는 "육신이 다할 때까지 뛰겠다"고 말했다. 그의 92년 인생사를 잘 표현해준 수상 소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