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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698. 첫 서울구경
5월은 가족 행사가 많은 달이다. 근로자의 날로 시작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석가탄신일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행사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음력 생일인 석가탄신일과 양력 생일인 5월 27일까지 모두 5월에 몰려 있다.
문득 어린 시절 때 5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1955년 무렵, 처음 서울 구경을 했다. 어머니에겐 친어머니나 다름없던 이모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부고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상을 치른 뒤 충주로 내려가기 전에 어머니는 내게 서울을 구경시켜 주셨다.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은 창경원이었다. 서울 한복판, 옛 궁궐에 자리한 창경원은 서울 시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유원지였다.
특히 벚꽃이 만발할 무렵, 창경원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창경원을 산책했다. 난생처음 보는 동물도 많았다. 원숭이와 호랑이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1960년, 1970년대 창경원은 동물원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창경원의 명물인 코끼리 사육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코끼리를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개방했다. 케이블카와 코끼리 열차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서울 시민이 약 500만 명이던 1970년대 무렵에는 하루에 13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 있는 유원지였다.
창경원을 관람하는 동안 내 머릿속은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조선 옛 궁궐의 전각과 동물원의 구조가 전혀 맞지 않았다. 왜 조선의 왕과 왕비가 살던 공간에 원숭이와 호랑이가 있을까란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때의 기억에 흥인지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연산군이 이 문으로 나갔다’. 하지만 지금 이 문구를 기록에 남긴 사진은 어디에도 없다.
또 창경원과 종묘 사이의 길도 기억에 남는다. 1931년 일제가 율곡로를 만들면서 창경원과 종묘 사이의 담장을 허물어 버렸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제일 먼저 세운 건물이 경복궁과 종묘였다. 궁에서 종묘로 가는 길을 끊는다는 것은 왕기를 해치는 일이었다. 순종은 죽는 날까지 창경원과 종묘 사잇길을 내는 도시계획에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5월의 화창한 날씨, 창경원 나들이는 행복했지만 왠지 씁쓸했다. 동물원으로 전락한 옛 궁궐의 위상이 안타까웠다. 창경원에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이 슬픈 역사의 궁궐이 일제에 의해 동물원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언젠가 꼭 창경원이 옛 모습을 되찾길, 마치 꿈처럼 소망했다.
창경원 외에도 나를 놀라게 했던 서울의 명물은 단연 전차였다. 충주에서는 볼 수도 탈 수도 없었던 전차를 마치 놀이기구 타듯 신나게 즐겼다. 1만 대 가까이 있는 자동차도 놀라웠다. 넓은 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울의 예쁜 누나들도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서울 누나들은 옷도 잘 입고, 화장도 고와서 얼굴이 더 예뻐 보였다.
그로부터 63년이 흘렀다. 1980년대에 서울대공원이 생기면서 창경원의 동물들은 모두 이곳으로 이주했고 창경원은 옛 모습을 되찾았다. 88년 만에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담장 길도 복원된다. 2019년에는 종묘와 창경궁의 담장 길을 걸어서 다닐 수 있다고 한다. 1955년 처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서울을 구경한 시골 소년이 소원했던 꿈이 드디어 이뤄지게 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불가능했던 모든 꿈들이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창경궁과 종묘 담장 길 복원 공사를 바라보며 통일의 그날도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