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러시아의 곳곳에선 증명사진과 이름이 들어간 목걸이 형태의 신분증을 걸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경기장 주변뿐만 아니라 주요 관광지, 공항, 기차역 등에도 이 신분증을 목에 건 사람을 만난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러시아가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처음 도입한 ‘팬(fan) ID’다. 월드컵 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하려는 축구 팬들은 입장권뿐만 아니라 이른바 ‘관중 신분증’인 팬 ID를 발급받아야 경기장에 출입할 수 있다.
‘팬 ID’를 만든 이유는 축구 팬 정보를 미리 수집해 테러를 방지하고, 인종차별주의자와 훌리건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지난 2016년 프랑스에서 열린 유럽선수권(유로 2016) 당시 발생한 이슬람 국가(IS)의 테러 시도, 러시아와 잉글랜드 훌리건의 집단 폭력 사태 등이 계기가 됐다.
팬 ID 보급에 누구보다 앞장선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66) 러시아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달 3일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과 함께 소치를 방문해 직접 팬 ID를 목에 걸고 홍보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월드컵 개최국 러시아는 지구 전체 육지 면적의 7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광활한데, 드넓은 국토 곳곳에 자리 잡은 개최도시 11곳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50만 개 이상의 팬 ID를 제작했다.
월드컵 현장을 취재하며 체감하는 러시아는 조용하고, 깨끗하고, 친절한 나라다. 출발 전 여행사 관계자로부터 “해가 진 이후엔 절대로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말라.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고 긴장했는데,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밤길이 안전한 러시아’를 만드는 데 ‘얼굴 박힌 신분증’인 팬 ID가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게 FIFA의 평가다. 팬 ID는 암표 거래를 방지하거나, 경기장을 찾은 각국 축구 팬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능도 한다. 러시아 축구 팬 안톤은 “축구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랑배들과 테러리스트를 미리 걸러낼 수 있으니 팬 ID는 유익한 제도”라고 말했다.
‘안전 월드컵’을 위한 러시아 정부의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장과 길거리 응원장 ‘팬 페스트(fan fest)’ 주변은 물론 도심지 곳곳에 경찰과 군인을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또 월드컵 기간 안전을 위해 ‘간헐적 금주령’도 내렸다. 음주 관련 불상사가 많은 러시아는 월드컵 개최도시에 한해 경기일 하루 전과 당일, 주점을 제외한 대형마트와 상점의 술 판매를 전면 금지했다. 한국-멕시코전 하루 전인 지난 23일 개최도시 로스토프나도누의 숙소 인근 대형마트에 들렀다가 주류 판매 코너가 통째로 폐쇄된 장면을 목격했다.
과감하고 기발한 조치들은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 러시아의 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의 개막전을 찾아 “축구를 향한 사랑은 언어와 이념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한 팀으로 묶는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또 러시아가 5-0으로 승리한 직후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위로했다. 경기장은 콜로세움 같았고, 푸틴은 21세기판 차르(러시아 황제) 같았다.
러시아에서 20년째 장기 집권 중인 푸틴의 지배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개막전 직후 공식기자회견에 참석한 스타니슬라프 체르체소프 러시아 대표팀 감독은 소감을 밝히다 말고 휴대전화를 들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떴다가 몇 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전 세계 취재진을 상대로 결례를 범했지만, 체르체소프 감독은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 승리를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달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국제 사회에서 푸틴 대통령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및 시리아 내전 개입,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논란에 이어 지난 3월 영국에서 발생한 스파이 독살 논란까지 줄줄이 이어지며 곤욕을 치렀다. 푸틴은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 본인은 물론 러시아의 이미지를 쇄신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경기장 신축 및 인프라 확장에 110억 달러(11조9000억원)를 쏟아부었다.
‘푸틴 스타일’로 밀어붙인 러시아 월드컵은 현재까진 합격점을 받고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 중인 대학생 이상록 씨는 “러시아는 본래 아이스하키에 열광하는 나라인데, 월드컵 개막을 전후해 축구의 인기가 높아졌다”면서 “한국과 스웨덴 경기 당일 도심지 주변 술집의 맥주가 동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내국인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데 어울려 이전에 보지 못한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일찌감치 16강 진출을 확정하면서 모스크바 거리 곳곳에선 “로씨야(러시아의 본토 발음)”를 외치는 축구 팬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와 닮았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이 월드컵을 활용해 서방 세계의 러시아 경제제재 조치에 김을 빼놨다”면서 “다음 달 16일 결승전이 끝난 직후 푸틴 대통령이 우승팀에 FIFA 컵을 전달하는 장면이야말로 러시아가 기대하는 이번 월드컵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푸틴 대통령은 월드컵을 통해 ‘국제무대에 러시아가 돌아왔다’고 외치려 한다.
그러나 러시아 월드컵이 100점 만점은 아니다. 여전히 숙박업소나 음식점에선 의사소통이 힘들고, 일부 택시기사들은 난폭 운전에 바가지요금을 씌우기 다반사다. 평소보다 10배 이상으로 치솟은 숙박비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