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훈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태권도 남자 68kg급 정상에 오른 뒤 금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대훈은 한국 태권도 겨루기 역사상 첫 아시안게임 3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IS포토
한국 태권도 겨루기 사상 첫 아시안게임 3회 연속 금자탑을 세운 이대훈(26·대전시체육회)은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행동으로 먼저 보이고, 말을 꼭 해야 하는 상황에선 '정답'만을 말한다. 2010년 18세 고교생 신분으로 처음 태극마크를 단 뒤 매트 안과 밖에서 줄곧 정상을 지켜온 비결이다. 지난 23일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태권도 남자 68kg급 결승에서 아미르모함마드 바흐시칼로리(29·이란)를 12-10으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을 때도 그랬다.
대기록을 세웠지만, 크게 기뻐하지도, 세리머니를 하지도 않았다. 대신 매트에 주저앉은 상대 선수에게 다가가 위로했다. 마치 2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당시 우승자였던 아흐마드 아부가우시(22·요르단)와 경기에서 지고도 승자의 손을 들어 주며 '패자의 품격'을 보였던 상황을 연상케 했다.
우승 기자회견에선 "태권도는 우리가 종주국이고, 우리나라의 국기인데 우리가 잘하면 당연히 기분이 좋다. 다른 나라 선수가 이기면 '태권도가 점점 세계화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라며 흐트러짐 없었다. '태권V'라는 별명이 태권도를 잘해서가 아니라, 로봇처럼 뻔한 말만 해서 붙은 별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일 자정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아시안게임 선수촌에서 만난 이대훈은 평소와 달랐다. 선수단 회식에 참석해 가벼운 마음으로 소주를 두 잔 마셨다고 한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대훈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꼈고, 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고 말했다. '냉혹한 승부사' 이대훈의 인간미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리우 올림픽 이후 첫 메이저 대회다. 가까운 동료들도 모르는 고민이 있었을텐데. "올림픽 이후 지난 2년간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국제 대회 10여 개에 출전해 단 한 판도 지지 않고 모두 우승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태권도에 관심이 있으신 소수 팬들만 알고 있다. 일반 팬들은 이번 아시안게임을 통해 이대훈이라는 선수를 2년 만에 보는 셈이다. 그분들에겐 리우 올림픽에서 진 모습이 나에 대한 가장 최근 기억이다. 이번에도 지고 승자의 손이나 들어 주는 모습을 보이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기지 못하는 '매너남'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 3회 연속 금메달 기록도 걸려 있었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 선발되면 부담감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번엔 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대회 3연패 때문이 아니다. 하필 올림픽에서 나를 이긴 아부가우시가 이번에도 같은 체급에 출전해 무척 부담스러웠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태극마크를 단 건 좋았지만, 지금까지 잘했던 것들이, 올림픽만큼 큰 주목을 받는 아시안게임 결과 한번에 무너질까 봐 걱정됐다. 팬들의 기억에 나는 영원히 '패자'로 남게 되는 것 아닌가."
- 각오가 남달랐을 텐데. "평소엔 성적보다 더 빠르고 더 공격적인 플레이를 해서 팬들에게 태권도의 재미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나선다. 무척 오랜만에 '금메달을 따지 않으면 다 소용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이기지도 못하면서 무슨 재밌는 태권도냐'는 비아냥거림이 싫었다. 승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재밌는 태권도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부가우시를 만나면 말 그대로 '닥치고 승리' 모드로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혹독하게 준비했나.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다.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다보니, 남은 게 팔 근력이더라. 턱걸이를 시작했다. 운동선수들은 턱걸이를 수십 개씩은 거뜬히 해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때 나는 한 개도 못했다.(웃음) 처음엔 무작정 매달렸다. 버틸 만해질 때쯤엔 시간을 조금씩 늘렸다. 훈련 중에 잠깐 쉬는 시간에도 10초씩 매달렸고, 훈련이 끝난 뒤에도 홀로 철봉과 씨름했다. 코치 선생님들이 '또 턱걸이 하니?' '지금은 몇 개나 하니' 등 내가 하는 턱걸이를 두고 농담이 생겨날 만큼 철봉에 붙어서 살았다. 이젠 수십 개씩 여러 세트로 나눠서 할 만큼 잘한다."
- 다행히 아부가우시와는 맞붙지 않았지만 결승에서 고전했다. 천하의 이대훈도 방심했나. "아부가우시가 아닌 이란의 바흐시칼로리가 결승에 올라온 것을 보고 내가 체력과 경험에 앞설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고전했다. 1라운드 1-4로 리드 당한 상황에선 '어, 이러다 지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더라. 이번에 지면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위기 상황에서 베테랑다운 경기 운용이 빛났다. "시합 중 코너에 몰리는 경우 작전을 바꾸거나 한 가지 작전만 밀고 나가는 게 보통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경기를 운용했다. 발차기를 많이 했는데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발차기로 체력을 소모하기보다 주먹으로 바꿔 보기로 하고 질렀다. 이때 평소 턱걸이 훈련을 해둔 것이 도움이 됐다. 물론 시원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경기 운용을 한 것은 맞다. 경기 자체는 나보다 이란 선수가 더 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웃음)"
-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무거운 짐을 덜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 기쁘지는 않다. '한시름 놓았다' 정도다."
- 3회 연속 금메달을 딴 선수치고 과하게 겸손한 소감이다. "올림픽을 경험한 뒤부터 언젠가 또다시 질 수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경험해 봐서 그렇다. 질 때가 된 것 같은데 매번 성적이 좋으니 괜한 걱정이 든다. 물론 이번 아시안게임은 최근 몇 년간 한 우승 중 가장 기분이 좋았다.(웃음)"
- 다음 목표는 2년 뒤 도쿄올림픽인가. "목표는 그렇다. 하지만 태극마크를 다는 것은 모든 태권도선수들의 꿈이다. 올림픽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하다. 쉬운 일이 아니기에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 말은 조심스럽게 해도 '태권V' 이대훈은 늘 강했다. "감독님께서 이례적으로 선수단에 휴가를 주셨다.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에너지를 충전해서 (도쿄)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달리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