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점을 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이하 부국제)의 키워드는 '살얼음판'이다. 20여 년간 꽝꽝 얼려 놓았던 안전한 얼음이 최근 몇 년간 녹아 내리면서 다시 완벽하게 얼려지지는 못한 모양새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모두가 잔뜩 긴장해야 했던 전반부.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살얼음이 깨져 큰 사고가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올해 부국제는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이사장으로 컴백하고, 전양준 집행위원장이 새 집행부로 자리매김 하면서 '다시, 시작'을 슬로건을 내걸고 정상화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전환점의 시간을 선물할 것이라 약속했다. '처음'은 늘 그렇듯 어수선하기 마련이다. 쌓아 둔 노련미로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을 보였지만 완벽한 정상화를 위해서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뭉친' 영화인들
일단 영화인들은 똘똘 뭉쳤다. 각 영화 단체의 보이콧이 해제되면서 전성기 때 만큼은 아니지만 암흑기처럼 조용한 부국제도 아니었다. 밤 행사가 부활했고, 부국제를 위해 수 많은 배우들과 감독들이 부산을 찾았다. 낯익은 얼굴과 인사하고 근황을 묻기엔 영화제만큼 좋은 자리가 없다. 특별한 작품 없이 개막식에 참석한 유연석, 윤제균 감독의 부탁으로 '한국 영화 감독의 밤'에 모습을 드러낸 하지원, 당초 게스트 명단에 없었지만 '변산(이준익 감독)' 행사 소식을 듣고 홀로 기차를 타고 내려 온 고준, 그리고 배성우·심은경 등은 올해 부국제의 깜짝 손님이었다.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 이나영을 시작으로 김남길·김희애·문소리·유아인·주지훈·장동건·한지민·현빈 등 부산 곳곳에서 의리를 지킨 스타들도 많다. '창궐' 장동건과 현빈은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영화제를 빛내기 위해, 또 개봉을 앞둔 영화를 위해 부산을 직접 찾았고, 두 편의 영화로 부산을 방문한 문소리는 큰 행사보다는 관객과의 대화(GV)를 통해 영화제의 진정한 주인공 관객들과 소통하는데 집중했다.
개막식 사회와 '미쓰백'으로 부산을 방문한 한지민은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모두 챙겨 눈길을 끌었다. 개막식 사회를 무사히 진행한 후 전반부 내내 부산에 머물며 무대인사를 비롯해 라디오 공개방송, KBS 2TV '해피투게더4' 첫 게스트 녹화도 부산에서 마쳤다. 주지훈은 그야말로 '밤의 황제'였다.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2018년의 배우'로 꼽힌 주지훈은 영화제 공식 행사와 시상식까지 눈 코 뜰 새 없는 일정 속에서도 배급사·제작사 등 부활한 각종 밤 행사에 빠짐없이 눈도장을 찍으며 감사인사를 건네 '주지훈의 밤'을 완성했다.
다만 해운대의 명물 포차촌은 조용했다. 밤마다 쏟아진 비는 게스트들의 발걸음을 쉽게 돌리지 못했다. 포차촌이 익숙한 몇몇 감독들만이 삼사오오 자리해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인 것이 전부였다. 예년보다 참석 인원이 많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불과해 '영화제 기간동안 해운대 인근만 돌아다녀도 유명 감독과 배우들을 분, 초 단위로 마주칠 수 있다'는 과거 분위기 역시 완벽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콩레이 영향권…지옥의 반나절
초대받지 못한 손님도 있었다. 바로 태풍 콩레이다. 전반부 어수선한 상황의 8할은 반나절만에 부국제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콩레이의 영향이 크다. 지난 6일 오전부터 휘몰아친 태풍의 위력은 모든 스케줄을 꼬이게 만들었고, 축제 분위기까지 앗아갔다. 야외 행사는 장소만 두 번을 옮겼다. 부국제 명당 해운대 비프빌리지를 포기하면서 영화의전당 두레라움 광장으로 이동했지만 결국 1층 라운지까지 들어서야 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관객을 수용 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취재진들 사이에서는 "영화 기사보다 날씨 기사를 더 많이 쓴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단 시간이었지만 부산이 고립 아닌 고립 상태가 되면서 게스트들의 발은 당연히 묶여야 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기본, 줄줄이 취소된 스케줄에 발길을 돌린 스타들도 많았고, 아오이 유우 등 일본 배우들은 부산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최종 결항되면서 아쉬운 불참을 통보했다. '버닝' 유아인·전종서는 시간을 옮기는 초강수 속 겨우 관객들을 만났다. 6일 오후부터 언제 태풍이 왔냐는 듯 맑게 개인 하늘이 야속하고 허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상황. 한 관계자는 "영화제 기간 선정 0순위는 날씨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변수는 매 해 있기 마련이지만 최대한 피할 수 있는 날짜를 파악하는 것도 영화제 측의 몫 아닐까 싶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팬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태풍을 뚫는 과감함도 보였다. 부국제 측은 오전 일정을 모조리 취소 하면서도 영화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GV)는 가장 빠르게 재개 시켰다. 예상보다 취소 표가 많이 풀리지 않는 이유였다. 부국제 측 관계자는 "이른 오전부터 위험한 날씨가 지속됐기 때문에 취소표도 많이 풀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상영 자체를 취소하지 않는 한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취소한 사례는 많지 않다. 실제 객석도 꽉 차더라"며 "태풍까지 이겨낸 애정에 또 한 번 놀랐다"고 전했다.
▶미흡한 행사진행, 부끄러운 사과
문제적 이슈도 피하지 못했다. 예민한 정치적 발언이라 조용히 넘어갈 수 없었다. 7일 오전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맞닥뜨린 소식은 부국제 측의 사과문. 부국제 측은 5일 뉴 커런츠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한 쿠니무라 준에게 민감한 정치적 발언을 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했다. 기자회견에서 한 취재진은 쿠니무라 준에게 "일본 배우로 최근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해상자위대의 욱일기 게양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고, 쿠니무라 준은 자신의 생각을 밝혀야 했다. 소신 답변은 결국 시시비비를 엇갈리게 만들었고, 억측과 오해가 쌓이면서 부국제 측의 사과, 쿠니무라 준의 재 입장표명이라는 촌극을 낳았다.
넘어야 한계는 또 있다. 후반부다. 전반부는 수 많은 이들의 도움 속에 축제 분위기를 완성했지만, 폐막까지 버텨낼 힘이 부족하다. 전반부만큼 특별한 행사나 게스트 없이 영화의 힘과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 팬들의 애정으로만 영화제를 이끌어가야 한다. 물론 영화를 즐기기엔 '외지인'이 모두 떠난 조용한 지금이 진정한 축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부국제가 지속돼야 할 이유와 지속되어 온 힘, 그리고 부국제가 잊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화와 영화 팬들의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