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에 '코덕(코스메틱 덕후의 약자)'들의 성지가 탄생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이 지난달 28일 새롭게 론칭한 화장품 편집숍 '아리따움 라이브 강남점(이하 라이브 강남)'이다. 라이브 강남은 종전 아리따움과 달리 아모레퍼시픽 브랜드 외에 타사 제품을 총망라해 판매한다. '화장품 가게에서 화장품을 판다는데 뭐가 특별하나'라고 묻는다면 국내 뷰티 업계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등 국내 굴지 화장품 기업들은 당사가 운영하는 매장에서 타사 브랜드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모레퍼시픽은 "플랫폼 사업 모델의 시대가 왔다"며 전격 변화를 선언했다. 기자가 지난 12일 라이브 강남을 직접 찾았다.
'코덕'의 놀이터… 뷰티 바에서 피부 진단, 스타일링 바에서 화장 공부
"여기가 화장품 매장이야 아니면 문화공간이야?"
라이브 강남에 들어선 첫인상은 이랬다. 화장품이 빼곡히 들어찬 타 매장과 달리 피부와 '뷰티 팁'에 대한 각종 읽을거리와 볼거리가 매장 입구부터 비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매장 중심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라는 책까지 놓여 있었다. 하나하나 읽어 가며 코너를 통과하자 이번에는 대형 쇼핑몰이나 호텔 라운지에서 볼 수 있는 초대형 LED 화면과 사각형 구조의 바가 나왔다.
"우리 라이브 강남의 특별한 공간인 '뷰티 바'입니다. 아모레퍼시픽 화장품을 개발하는 연구원과 함께 피부 진단을 받을 수 있어요. 보습도를 체크해 보세요." 매장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바에 앉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임상 기기를 팔에 가져다 댔다. "30~70% 정도의 보습도가 정상 범주입니다. 고객님은 37%네요."
연구원의 진단이 끝나자 왼쪽 '스타일링 바'에서는 별안간 '철판쇼'가 열렸다. 메이크업전문가가 나와 각양각색의 립 재료를 모은 뒤 고객에게 가장 잘 맞는 립 컬러를 만들어 주는 '컬러믹스'를 시작한 것이다. 철판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듯한 느낌의 컬러믹스 과정이 끝나자 아티스트가 완성된 립 제품을 작은 통에 담아 선물로 줬다.
작은 바 두 곳을 체험했을 뿐인데 시간은 30분이나 훌쩍 지나 있었다. 두 손에는 각 바에서 선물로 준 무료 체험 샘플이 가득했다. 장은애 라이브 강남 매니저는 "뷰티 바 등을 한 바퀴 돌며 체험만 해도 30~40분이 걸린다. 이외에도 '브러시 클렌징 바' '큐레이션존' 등 고객이 전문가의 조언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라이브 강남을 찾은 상당수 고객이 기자와 같은 동선을 걷고 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고 체험하는 사이, 마음에 드는 제품을 발견해 한두 개씩 바구니에 담아 넣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장 매니저는 "매장을 방문하고 나가던 고객들이 '여기, 코덕들의 성지가 되겠는데…'라고 감탄하는 경우가 많다. 화장품 판매를 넘어 체험 공간이라는 점을 긍정적으로 봐 준 것 같아 뿌듯하다"며 "백화점 등 화장품 유통 업계에 8년 가까이 있었지만 아리따움의 변신은 확실히 다르고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세포라, 화장품 편집숍판 '삐에로쇼핑'
최근 수년 사이에 한국 뷰티 유통 업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과거만 해도 백화점과 각 화장품 브랜드 오프라인 매장에서 코스메틱 제품을 사던 고객들이 한 번에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살 수 있는 H&B 스토어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에는 신세계백화점이 강남역에 고급 편집숍인 '시코르'를 론칭하며 종전 화장품 제조·유통 업계 트렌드를 이끌어 갔다. 내년에는 글로벌 화장품 편집숍인 세포라가 한국 상륙을 전격 공식화했다. 'K뷰티' 간판 기업인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등 화장품 회사들의 운신도 그만큼 좁아졌다. 그렇다고 수십 년째 고수해 온 '우리 매장에서는 우리 제품만 팔겠다'라는 방침을 고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추이만 살피던 업계에서 제일 먼저 칼을 빼 든 곳은 아모레퍼시픽이었다. 지난 9월 말 론칭한 라이브 강남을 시작으로 아리따움에서도 타사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특히 라이브 강남에서는 고가 브랜드에 방점을 찍은 시코르와 달리 중저가 제품을 총망라하며 젊은층 사이에서 '화장품 업계의 삐에로쇼핑'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에 따르면 라이브 강남에는 그룹 브랜드 11개와 외부 브랜드 59개가 입점해 있다. 아모레퍼시픽 내에서도 '설화수' 등 고가 라인은 제외하고, '헤라'와 '라네즈' 등 20~30대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 중심의 제품을 집중 배치했다.
이날 라이브 강남을 찾은 고객 김정화(31)씨는 "세포라처럼 비치된 화장품 종류가 정말 많다. 또 국내 편집숍 중에서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면서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이 섞여 있어서 내가 필요한 화장품을 찾고 사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라이브 강남에서 만난 고객들은 매장 곳곳에 비치된 각종 체험 공간과 샘플을 직접 이용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을 구매하고 있었다.
아리따움의 과감한 변화는 계속될 전망이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의 한 관계자는 "라이브 강남 한 곳이 아니라 전국 1300개 아리따움 매장이 변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사업 모델이 플랫폼 형식으로 바뀌고 있다. 이 방식에 얼마나 빨리 가까워지냐에 따라 기업의 미래 방향이 결정될 것"이라며 향후 행보를 분명히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화장품을 한 브랜드로 다 사용하는 추세였다면, 최근 브랜드별로 특점 제품만 쓰는 고객이 늘고 있다. 브랜드숍이 지고 편집숍 개념의 H&B 스토어가 뜨는 이유"라며 "아리따움의 변화는 아모레퍼시픽이 이런 추세를 포용하고 선제적으로 시장을 이끌어 가겠다는 포석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LG생활건강의 네이처컬렉션도 종전 '더페이스샵' 브랜드숍을 편집숍으로 변화시키는 등 아리따움의 길을 걷을 것으로 보인다. 연쇄적으로 업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