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내린 눈은 봄이면 녹아 사라진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사이, 2018 평창겨울올림픽의 영광도 눈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창의 얼음 트랙 위에서 썰매를 끌던 선수들은 이제 '올림픽 그 후'의 차가운 현실에 맞서 레이스를 이어 가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평창에서 새 역사를 쓴 봅슬레이·스켈레톤대표팀 얘기다.
이용(40) 총감독이 이끄는 한국 봅슬레이·스켈레톤대표팀 선수들은 23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 파크텔에서 시즌 개막을 앞두고 미디어데이 행사를 가졌다. 봅슬레이·스켈레톤대표팀은 지난 2월 열린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금메달과 봅슬레이 4인승 은메달, 총 2개의 메달을 수확하며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썰매 역사를 다시 썼다. 특히 스켈레톤의 윤성빈(24·강원도청)은 이 종목 '황제'로 군림하던 마르틴스 두쿠르스(34·라트비아)를 제치고 압도적인 레이스로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런 업적을 바탕으로 윤성빈은 제56회 대한민국체육상 경기상을, 이 총감독은 지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첫 시즌을 맞아 미디어데이 행사에 나선 선수단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이 총감독은 "올 시즌 훈련을 정말 많이 했다. 베이징을 향해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하고 있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경기장을 이용하지 못한 탓에 경기력은 불분명한 상황"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이 끝난 뒤 정부의 지원이 큰 폭으로 줄어들면서 훈련 환경이 열악해진 탓이다. 이 총감독은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다.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면 우리 종목의 서러움을 다 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선 선수들에게 미래지향적인 얘기, 동기부여를 해 줄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원윤종(33·강원도청) 역시 "올림픽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후배들에게 얘기해 왔는데, 슬라이딩 훈련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 해 줄 말도 없고 의심도 많이 생겼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사실 올림픽 이후 각 종목별 지원 삭감은 어느 정도 '예고된 수순'이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불모지였던 한국 겨울스포츠에 지원이 쏟아졌고, 메달 기대 종목으로 급부상한 봅슬레이·스켈레톤은 '올림픽 특수'를 누렸다. 현대자동차가 국산 썰매 제작에 나섰고, 국내에 아이스 스타트 훈련장과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트랙이 생기면서 썰매 강국 못지않은 환경이 조성됐다. 외국인 코치를 영입하고 선수단 규모가 늘어나면서 봅슬레이·스켈레톤의 황금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난 뒤 이런 '특수'는 사라졌다. 정부 예산은 삭감됐고 현대자동차는 썰매 개발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트랙을 활용하기 위해 인터컨티넨탈컵(ICC) 대회와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했지만 지자체나 정부 모두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 대한 활용 방안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대회를 유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란 뜻이다. 이 총감독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내년 4월 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불안한 현실과 싸우고 있는 것은 '스켈레톤 황제'로 등극한 윤성빈도 마찬가지다. 윤성빈은 "지난 시즌 우리 트랙에서 훈련하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데 올 시즌엔 그런 환경이 아니다 보니 아쉬움이 있다"며 "부담을 느낀다기보다 지금 처한 현실에 걸맞은 성적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최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100% 노력을 기울여도 부족한 상황이지만, 현실이 따라 주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이 총감독은 "평창을 7년 동안 준비했는데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까지 준비 기간이 4년 남았는데 1분 1초가 절실하다"며 "4년 뒤 베이징을 생각할 때 지금 팀의 완성도는 50% 이하다. 우리가 해야 하는 계획들이 점점 더 늦춰지면서 베이징 목표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불안을 품은 대표팀은 24일 캐나다 휘슬러로 출국, 열흘간 훈련한 뒤 2018~2019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IBSF) 월드컵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유럽으로 이동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