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3일 오후 신성일의 사망설이 보도되며 오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57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되며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당시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신성일이란 예명을 받았다.
이후 신필름을 나와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진 것과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주연작만 500편을 넘겼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개봉한 1194편의 작품 중 324편이 그의 출연작이었다. 그와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여배우만 119명에 달했다. 연기 뿐 아니라 제작과 연출에도 도전해,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을 제작하고 연출했다. '그건 너'(1974)를 연출하고,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 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 등을 제작했다.
많은 활동을 한 만큼 화려한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64년 제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아시아영화제, 황금촬영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다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까지도 영화인으로 대중 앞에 섰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영화팬들과 만났다. 당시 신성일은 인터뷰를 통해 "젊은 친구들이나 나 하나쯤 몰라도, 관심 없어도 세상 사는데 큰 문제가 없겠지만 나이 좀 드신 분들은 내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들에게는 의미있는 일이고 또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온 신성일이다"고 밝혔다. 또한, 암 투병 중에도 작품 활동 계획을 전하기도 했다. 영화 '행복'에 대해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다시 쓰고 있다. 내년 봄에 촬영 들어가려고 한다"고 이야기했고, "두 번째 작품은 김홍신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김홍신과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저작권까지 다 받았다. 이렇게 2년 간의 일정이 잡혀있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영화와 함께해온 신성일은 결국 계획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무수히 많은 작품과 한국영화사에 써내려온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1964년 당대 최고의 톱 배우 엄앵란과 결혼한 고인은 장남 강석현씨, 장녀 강경아씨, 차녀 강수화씨 등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6일 진행되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