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8일은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에 기록될 만한 날이다. 김연아(28·은퇴) 이후 좀처럼 국제무대에서 메달 소식을 듣기 어려웠던 한국 피겨계에 그랑프리 파이널 동메달이라는 낭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낭보의 주인공은 한국 피겨 남자 싱글의 '기대주' 차준환(17·휘문고)이다. 차준환은 8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018~2019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 91.58점, 구성점수(PCS) 83.84점, 감점 1점을 합쳐 174.42점을 받았다. 전날 쇼트프로그램에서 89.07점으로 4위에 올랐던 차준환은 총점 263.49점을 기록, 네이선 첸(19·미국·282.42점)과 우노 쇼마(21·일본·275.10점)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랑프리 파이널은 한 시즌 ISU 그랑프리 7개 대회의 성적을 합산해 상위 6명만이 출전하는 일종의 '왕중왕전'이다. 그랑프리 시리즈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7개 대회 중 2개 대회에만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 자격은 각 대회 입상자들이 나눠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하기 위해선 출전한 그랑프리 대회에서 시상대에 서야한다는 얘기다. 차준환은 올 시즌 그랑프리 2차와 3차 대회에서 모두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랭킹 포인트 22점을 획득,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권을 스스로 획득했다.
그랑프리 대회에서 메달을 목에 건 것도 한국 남자 선수로는 처음이었고, 남녀를 통틀어도 김연아가 2009~2010시즌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 9년 만이었다. 그랑프리 파이널은커녕 그랑프리 대회 메달 소식도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한국 피겨계엔 낭보 그 자체였다. 여기에 막강한 우승후보 하뉴 유즈루(24·일본)가 발목 부상을 이유로 기권하면서 메달권 진입까지 노려볼 만한 분위기가 형성됐고, 차준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에 동메달로 훌륭하게 답했다.
그야말로 놀라운 상승세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겨우 시니어 데뷔 2년차인 차준환이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하고, 메달까지 거머쥘 거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 김연아'로 불리면서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경기력엔 기복이 있었고, 시니어 데뷔 시즌이었던 작년엔 부츠 문제와 부상에 고생하기도 했다. 완성형이 아닌 성장형 선수인 만큼, 지금 당장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기보다 미래를 기대해볼 법한 선수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평가였다.
그러나 차준환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경험하며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해 치러진 제72회 전국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서 대역전극을 펼치면서 2018 평창겨울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차준환은 종합 15위로 올림픽을 마무리하며 가능성을 증명했다. 올림픽이란 큰 무대를 경험한 뒤 맞이한 올 시즌, 그랑프리 대회 2연속 동메달과 그랑프리 파이널 동메달이라는 성적표가 그의 성장을 보여주는 증거다.
차준환이 목에 건 메달보다 더욱 반가운 것은 그의 성장세다. 만 17세 48일의 나이로 그랑프리 파이널 시상대에 오른 차준환은 이번 대회 출전자 중 최연소일뿐만 아니라 역대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 싱글 수상자 중에서도 두 번째로 어린 선수로 기록됐다. 역대 최연소 기록 보유자는 바로 1998~1999시즌 만 16세 124일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짜르' 예브게니 플루셴코(36·러시아)다.
아직 시니어 데뷔 2년차인데다 나이도 어린 편이라 지금의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톱랭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쿼드러플 점프(4회전) 등 체력적으로 부담이 많이 가는 프로그램을 소화해야 하는 남자 싱글 선수들은 성장기를 지나 체격이 완성되고 근육이 생기는 20대 초반을 전성기로 본다. 그리고 차준환은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열리는 4년 뒤면 한창 전성기일 나이인 만 21세가 된다. 4년 뒤 베이징에서 보여줄 차준환의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