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짐 없는 모습과 잘생긴 얼굴의 대명사로 불리던 송승헌이 몇 년 전부터 '내려놓음'을 시작했다.
장르극으로 눈을 돌렸고 그 안에서도 '바바리맨'이 되더니 '사기꾼'까지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대중은 그의 변한 모습에 크게 환호했다. "장르극이 이렇게 매력적인지 이제 알았어요. 멜로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고 장르극 안에서 다양한 걸 보여줄 수 있다는게 상당히 좋았고요."
어느덧 데뷔 23년차다. 1995년 청바지 모델 선발대회 출신으로 우연한 기회에 MBC '남자셋 여자셋'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연기에 큰 뜻이 없는 진로 고민에 빠져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청바지 모델 발탁의 시작이 지금까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군가는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하겠지만 연기 자체에 흥미를 느낀 건 얼마 안 됐어요. 그 전에는 누가 시키는대로, 누가 알려준대로 움직였어요. 팬으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로 인해 새롭게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며칠만 지나면 40대 중반. 물론 누가 그 나이로 보겠냐만 결혼 적령기를 훌쩍 지났다. "결혼을 하고는 싶은데 아직 자신이 없어요. 사실 외로움도 잘 못 느끼고요. 철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제 짝이 있고 언젠간 만날거란 생각도 하고요."
만취 주량에 조금 못 미친 맥주 두 잔을 훌쩍 비운 송승헌과 데뷔부터 지금까지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벌써 데뷔한지 23년차에요. 실감나나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냥 모든게 다 엊그제 벌어진 일 같아요."
-그때는 20년 뒤를 생각했나요. "생각 전혀 못 했는데 지금와서 돌아보니 너무 생생해요. 지금도 앞으로 20년을 생각하라면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20년 뒤를 그려보자면요.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죠. 꼭 외적인게 아니라 작품 속에 잘 녹아들고 싶어요. 존경하는 선배님들처럼 멋있게 나이들고 싶죠. 대한민국에서 누군가에게 칭찬받는게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칭찬을 더 듣고 싶고요."
-지금껏 어떤 칭찬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송승헌 다시 봤다'는 말이 좋았어고 '저런 면이 있었나' 등의 반응을 보고 힘이 나더라고요. 칭찬을 들을 때마다 그동안 저는 몰랐던 대중과 벽이 있었다는걸 느꼈어요."
-듣고 싶은 말도 있나요. "앞서 들은 칭찬처럼 그동안 고착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듣는게 좋죠."
-돌이켜보면 손꼽을 만한 좋은 일이 있나요.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데뷔할 때죠. 모델이나 연기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저 아르바이트 해보려고 보낸 사진 한 장에 의류 모델이 됐고 카탈로그 촬영을 했어요. 내 사진이 성신여대 번화가에 걸려 있는 걸 지섭이와 새벽에 가 구경하며 너무 신기했죠.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었고 연예계에 전혀 관심 없었는데 둘의 사진이 그 큰 건물에 붙어있으니 놀라웠죠."
-상금도 있었나요. "일종의 계약금 명목인데 500만원이었어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부모님 드리고 술 마신 걸로 다 쓴 거 같아요.(웃음)"
-원래 꿈은 뭐였나요. "특별히 무엇이 되겠다는 게 없었고 운동선수나 호텔 비지니스 관련 일을 하고 싶었어요. 배우는 머릿 속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초반에는 연기와 관련해 쓴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연기에 대한 뜻이 크지 않아 욕을 엄청 많이 먹었죠. '이 길이 맞나' 싶으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했죠."
-그만두고 싶지 않았나요. "20대까지도 연기가 재미있던 적은 없었어요. 주변에서 다들 호응해주고 좋은 대본 가져오면 연기하고 의욕도 없고 그냥 시키면 하고 거절의 의사도 밝히지 않았어요. 노력하지 않았고 당연히 좋은 평가 못 받으며 20대를 그렇게 보냈어요."
-'재미없으면 그만두지'라는 반응도 있었을텐데요. "그게 또 그렇지 않더라고요. 팬들은 좋아해주는데 나는 재미없다고 '안 할래'라고 할 순 없었어요. 떠나는 것도 용기에요. 무책임하게 떠날 용기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특별한 계기에 생각이 바뀌었나요. "30대 중반에 팬레터를 받았어요. '당신의 연기를 보며 행복하고 감동을 느낀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라'는 말이었는데 너무 창피했어요. 찔러더라고요. 나는 감동을 주려고 연기한게 아니라 그냥 일이었는데 누군가는 감동을 받는다는 거에 찔리고 미안하고 감동이었죠. 배우로서 자세를 다잡는 큰 계기가 됐죠. 그때부터 임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거짓말처럼 이제야 연기라는게 재미있어요."
-요즘은 재미있나요. "팬들은 실망할 수 있지만 작품에 대한 욕심, 재미를 이제 느껴요."
-지금이라도 느껴 다행인가요. "더 늦지 않고 지금 안 다는 건 다행이잖아요. 물론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겠지만요."
-슬럼프가 있었나요. "30대 때 고민은 있었죠. 바깥에서의 송승헌과 스스로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괴리감. 남들은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할 수 있지만 마냥 행복하지 않았던 그때가 슬럼프라면 슬럼프죠."
-과거 작품도 다시 찾아보나요. "아니요. 못 보겠어요. 채널 돌리다가 '가을동화' 나오면 얼른 리모컨을 잡아요. 욕먹을 연기였다는 생각도 들지만 또 그때는 풋풋하고 잘 몰랐으니깐. 물론 신인이라는 걸로 다 무마되진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죠." >>[취중토크 ③] 에서 계속 김진석 기자 superjs@joongang.co.kr 사진=박세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