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 한국 취재진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다. "이 멀리까지 뭐 하러 왔나?"
"당신들이 자꾸 오니까 경기에서 지지 않나?"
"다른 나라 경기에 뭐 이리 관심이 많나?"
이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아주 공격적인 말투로 느껴진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냐고 반문하고 있고, 경기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 말을 듣는 상대방 입장이면 매우 불쾌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느낌이 달라진다. 베트남의 국민 영웅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한 말들이다. 대상은 한국 취재진들이다. 박 감독을 잘 알고 있는 취재진이라면 이 말의 뜻을 느낄 수 있다. 경상도 남자의 '감사 표현법'이다.
기자는 전남 드래곤즈 담당이다. 2008년 박 감독이 전남 감독으로 부임한 뒤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인연이 시작된 후 언제나, 팀을 옮겨도, 성적이 좋아도, 나빠도, 베트남 감독이 돼 국민영웅으로 등극한 뒤에도 그의 표현법은 한결같았다. 무심한 척 표현하지만 깊은 정을 품고 있다.
한국 대표팀이 2019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에 참가하고 있다. 아시안컵 취재를 왔으면 일반적으로 한국 대표팀 취재에 올인한다. 다른 국가의 취재는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컵은 다르다. 베트남 대표팀 취재를 한국 대표팀 취재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 베트남 대표팀 경기와 훈련장에 수많은 한국 취재진들이 몰려들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항서의 베트남이 뜨거운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박 감독 취재 역시 한국 축구 취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한국 감독'이다. 한국 감독이 외국에서 이토록 성공한 사례는 한국 축구 역사상 없었다. 그의 리더십은 당연히 핵심 취재 대상이다.
베트남 대표팀 취재 현장을 가면 베트남 팬들도, 기자들도 크게 반겨주는 것 역시 베트남 취재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이렇게 열심히 베트남 대표팀 취재를 갈 때마다 박 감독은 무심한 목소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그 다음 항상 비슷한 행동을 한다. 박 감독이 한국 취재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심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이다.
"이 멀리까지 뭐 하러 왔나?"
이라크와 D조 1차전 공식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기자회견이 시작된 후 한국 취재진을 본 박 감독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저런 말을 했다.
'나와 베트남을 보기 위해 이 멀리까지 와줘서 고맙다'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한국 취재진의 손을 꼭 잡아준 뒤 기자회견장을 빠져 나갔다.
기자회견 도중 진행자가 한국 취재진에게 질문 기회를 주지 않자 박 감독이 직접 진행자에게 항의하는 모습도 나왔다. 진행자는 결국 한국 취재진에게 질문 마이크를 전달했다.
"당신들이 자꾸 오니까 경기에서 지지 않나?"
이란과 D조 2차전 공식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이날 베트남은 이란에 0-2로 졌다. 1차전 이라크와 2-3으로 패배한 뒤 2연패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두 경기 모두 한국 취재진이 현장에 있었다.
이 말의 뜻은 '이렇게 멀리까지 와 줬는데 이기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을 내뱉은 후 박 감독은 또 다시 모든 한국 취재진들의 손을 꼭 잡았다. 한국 취재진을 향한 미소도 빠뜨리지 않았다.
3차전 예멘전에는 한국 취재진 단 한 명도 가지 못했다. 이유는 한국의 C조 3차전 중국전이 열리는 날과 겹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베트남전을 가고 싶어도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 취재진이 없는 첫 경기. 베트남은 예멘을 2-0으로 누르고 첫 승을 올렸다. 박 감독 말이 맞았다.
"다른 나라 경기에 뭐 이리 관심이 많나?"
18일 두바이의 후마이드 알 타이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베트남 대표팀 훈련. 극적으로 16강에 오른 베트남 대표팀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또 수많은 한국 취재진이 몰렸다.
박 감독은 훈련을 진행하던 도중 한국 취재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리고 저 말을 꺼냈다. 이제는 쉽게 해설할 수 있다. '다른 나라 경기에 많은 관심을 보여줘 고맙다'는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살인미소를 보인 다음 "인사만 하고 갈게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박 감독의 무심한 말 뒤에 나오는 미소와 따뜻한 스킨십.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런데 고민이다. 베트남은 오는 20일 요르단과 16강전을 치른다. 한국 취재진이 가면 지고, 안 가면 이기는 베트남. 그날 한국 경기도 없다. 요르단전을 가야할까. 가지 말아야할까. 일단 티켓은 예약해 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