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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768. 섣달 그믐밤의 쓸쓸함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은 경쟁률이 치열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틀 동안 치러진 과거 응시자는 21만여 명이었다. 그중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자는 7만 명이 넘었고, 급제자는 장원급제 한 2명을 포함한 12명이었다. 무려 1만8000 대 1의 경쟁률인 셈이다.
과거 시험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35세, 평균 준비기간은 5세부터 시작해 25~30년 이상이었지만, 500년 동안 과거 급제자는 1만5000여 명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과거 시험은 붙을 확률보다 떨어질 확률이 훨씬 높은 국가시험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험이다 보니 부정행위도 속출했다. 숙종 때는 과거시험장으로 연결된 노끈이 발견되기도 했다. 커닝하기 위해 땅굴까지 파서 대나무 통을 땅에 묻고 그 안에 노끈을 연결해 시험문제와 답안지를 전달한 것이다. 너무 많은 인원이 시험을 치르다 보니 채점이 어려워 선착순 합격 방법을 쓰다가 상소가 빗발치기도 했다.
요즘 학원가에서 유행하는 팀플레이도 있었다. 최소 3명이 팀을 이룬 ‘접(接)’이 등장해 과거 시험을 특별히 준비했다. 또 시제가 붙어 있는 현제판 앞자리가 명당이라 해서 자리를 맡아 주는 선접꾼들끼리 싸우다가 사망 사고까지 발생했다.
이런 과거 시험에 색다른 책문(왕이 내린 시험문제)이 등장한 때는 광해군 8년인 1616년이었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우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정리하면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답하시오'라는 문제다.
섣달 그믐밤이 되면 왜 광해군은 서글퍼졌을까. 광해군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지만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다. 서출로 태어나 왕의 자리가 늘 불안했다. 이때 광해군 앞에 나타난 사람이 허균이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서출이었다. 두 사람은 이런 공통점 때문인지 급속히 가까워졌지만, 이를 두려워했던 이이첨에 의해 허균은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당하고 만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지만,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계속 광해군이 왕위를 지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인조처럼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날 광해군이 내린 책문에 명문으로 답한 이가 있었으니, 당대 유명한 시인이자 문인이었던 이명한이었다. “인생이란 부싯돌의 불처럼 짧고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는다…(중략)…그러나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것이다.” 이명한의 명문은 광해군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는 2등으로 과거에 합격했다.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은 광해군 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네 마음도 그렇다. 한 살 나이가 더 들어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수 있고, 취직을 못해 답답하거나, 자식을 낳지 못해 걱정되거나,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서글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생각 바꿔 보자. 내가 살아 있기에 섣달 그믐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한 살을 더 먹고, 한 해가 바뀌어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내 곁에 가족과 지인들이 있음에 행복해한다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광해군의 책문에 답한 이명한의 명문처럼, 세월은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설 명절을 보내며 지난 세월을 서글피 탓하지 말고, 그 세월 속에 살아 있는 나 자신과 내 가족과 지인들에게 감사하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