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화장품 유행을 선도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가 사라지고 있다. 한때 TV 홈쇼핑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시장에 속속 진출하면서 맥을 못 추고 있다. 활발한 제품 출시와 마케팅으로 여전히 대중에게 주목받는 메이크업전문가 브랜드는 조성아가 이끄는 CSA 코스믹에 그칠 정도로 부피가 줄었다.
홈쇼핑발 '아티스트 브랜드' 전성기를 기억하시나요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9년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화장품 브랜드의 르네상스였다. TV 홈쇼핑 채널을 켜면 어김없이 아티스트가 협업해 탄생한 화장품이 판매되곤 했다.
'조성아 헤어폼'의 조성아, '이경민 포레'의 이경민, 남성 아티스트 손대식·박태윤 등 연예인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으로 명성을 얻은 '2세대' 아티스트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소비자들은 이에 열광했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대규모 메이크업 숍을 운영하고 유명 연예인을 관리하는 아티스트가 홈쇼핑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아티스트가 전하는 제품 사용법은 물론이고 최신 화장술을 위한 '꿀팁'을 보고 배웠다.
애경산업이 조성아 원장과 함께 론칭한 '루나 by 조성아'는 초대박 상품이었다. 2006년 9월에 출시된 루나 by 조성아는 메이크업 도구와 화장품이 결합된 제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 제품을 사용하면 누구나 빠르고 쉽게 전문가 수준의 화장을 연출할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며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GS샵이 독점 판매한 루나 by 조성아는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4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조성아와 1년짜리 단발성 계약으로 출발한 애경산업은 이후 3년간 재계약을 맺었다.
종전까지 치약과 샴푸 등 생활용품 기업으로 잘 알려진 애경산업은 루나 by 조성아 덕에 화장품 기업의 발판을 다졌다. 업계에 따르면 2010년까지 애경산업 화장품 매출의 70%가 홈쇼핑 전용으로 판매된 루나 by 조성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GS샵 히트 상품 1~4위 자리 역시 루나 by 조성아의 제품이 올랐다. 론칭 6년간 누적 매출이 1700억원을 넘어섰다. 당시 홈쇼핑 업계는 '루나 효과(Luna Effect)'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제2의 루나'를 노리는 후발 주자들도 속속 등장했다. CJ오쇼핑과 엔프라니는 2008년 메이크업 아티스트 손대식·박태윤씨와 함께 'SEP'를 내놨다. '심플(Simple)' '이지(Easy)' '퍼펙트(Perfect)'의 앞머리 알파벳을 따온 SEP는 뚜껑 안쪽에 섀도를 채워 뚜껑을 열면 팁에 컬러가 저절로 묻는 다양한 아이디어 제품으로, 20대 초반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덕분에 SEP는 2010년 상반기까지 CJ오쇼핑의 메이크업 부문 1위에 올랐다. 누적 매출도 800억원을 달성하며 CJ오쇼핑의 간판 화장품이 됐다.
현대홈쇼핑과 한국화장품은 2010년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과 함께 색조 중심의 '크로키'를 론칭했다. 크로키는 판매 첫날 6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출시 1년 만에 매출 350억원을 내는 등 히트 브랜드가 됐다. 홈쇼핑 관계자들은 "초보자도 전문가 수준의 메이크업을 할 수 있도록 개발된 상품이 많았다. 방송을 보며 직접 따라 하는 것만으로 이들 제품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입소문 나 인기가 좋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LG생활건강은 2011년 유명 메이크업전문가 정샘물과 손잡고 홈쇼핑 메이크업 브랜드 '뮬'을 내놨다.
업계에 따르면 2006년 53억원에 그쳤던 홈쇼핑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 시장 규모는 2010년 961억원으로 5년 만에 약 18배 성장했다. 바야흐로 메이크업 아티스트 화장품의 전성기였다.
그 많았던 아티스트 화장품, 다 어디로 갔지 셀 수 없이 많았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화장품은 2019년 현재 절반 이상으로 쪼그라들었다. 'SEP' '비디비치' '뮬' '루나' 등은 브랜드 자체는 남아 있지만 대부분 초창기 컬래버레이션 상대였던 아티스트와 결별해 상관없는 제품이 됐다. 홀로 남은 메이크업전문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브랜드를 차렸다. 하지만 과거만큼 주목받는 브랜드는 극히 일부다.
조성아가 이끄는 CSA 코스믹은 아티스트 화장품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2012년 자신의 이름을 따 브랜드를 론칭한 조성아는 사세를 확장하자 4년 이후인 2016년 CSA 코스믹을 설립했다. CSA 코스믹은 현재 '조성아 뷰티' '16브랜드' '원더바스' 등 브랜드를 거느린 종합 화장품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홈쇼핑 내 인기도 여전하다. 액체형 고농축 세럼을 고체 형태로 만든 '에이치 세럼 스틱'은 지난해 홈쇼핑 프로그램에 등장하자마자 포털 사이트 검색어 상단 올랐다. 이 제품은 '물광 메이크업'의 창시자인 조성아의 노하우가 담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이크업 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언제든 덧바를 수 있고 화장품에 직접 손대지 않아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CSA 코스믹 관계자는 "한때 아티스트 브랜드의 홈쇼핑 론칭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홈쇼핑 채널에서 이렇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는 조성아가 유일하다고 본다"며 "조성아 대표가 직접 신제품 아이디어와 개발·마케팅까지 꼼꼼히 참여하고 있다. 30년 노하우가 집약되면서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화장품 기업 엔프라니, CJ오쇼핑과 SEP를 출시한 손대식·박태윤은 2017년 새로운 뷰티 브랜드 '제스젭'을 론칭했다. 제스젭은 메이크업에 꼭 필요한 제품과 컬러로 최대 효과를 내는 '미니멀X맥시멀'을 추구한다. 공식 온라인몰과 플래그십 스토어·시코르 입점 등 유통망을 점차 확대하고 있으나 아직 인지도가 높진 않다. 종전의 SEP는 CJ오쇼핑이 자체 화장품 브랜드로 삼고 라인을 강화하고 있다.
2014년 LG생활건강과 이별한 정샘물은 201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화장품 브랜드 ‘JUNG SAEM MOOL’을 론칭했다. 정샘물의 단독 브랜드인 만큼 아티스트가 추구하는 바와 색깔이 뚜렷한 편이라는 평가다. 과거 뮬이 홈쇼핑을 주요 판매처로 삼은 것과 달리 JUNG SAEM MOOL은 온라인 자사 몰과 제휴 몰 등을 통해 소비자들과 만나고 있다. 뮬은 2014년 LG생활건강의 색조 브랜드 VDL에 편입됐다. 현재는 'VDL 뮬 페이스 코렉팅 팔레트' 등 극히 일부 제품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다.
대기업·중소기업·가격 경쟁 치열…아티스트 브랜드도 '휘청' K뷰티 업계는 아티스트 브랜드가 침체한 이유로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과 해외 브랜드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홈쇼핑과 한국 뷰티 업계에 뛰어들면서 아티스트 브랜드가 설 자리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화장품 업계 1·2위 기업인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은 2010년 무렵부터 홈쇼핑 주력 브랜드를 선정해 밀기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의 인기 브랜드 '아이오페' '마몽드' '한율' '려' 등 네 가지 브랜드가 홈쇼핑을 통해 특가로 나오자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었다. LG생활건강은 '이자녹스'를 홈쇼핑 전면에 내세우고 최신 기술을 적용한 신제품도 TV 홈쇼핑 프로그램을 통해 먼저 선보였다.
중소기업도 앞다퉈 도전장을 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도 화장품 ODM(제조업자 개발·생산) 산업이 발달한 국가다. 누구나 제품을 의뢰하면 사양에 따라 화장품을 론칭할 수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중소 업체들은 ODM 사와 손잡고 각종 화장품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최근 홈쇼핑에서 팔리는 제품 중 상당수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화장품이다. 이들은 유명 연예인이나 방송인을 '쇼핑 호스트'로 모시면서 부족한 인지도를 채우고 있다. 한 홈쇼핑 업계의 관계자는 "루나 by 조성아가 공존의 히트를 치면서 비슷한 컨셉트의 브랜드 론칭이 줄을 이었다. 막판에는 더 이상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라는 이유로 차별화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전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는 과거 자신과 친한 스타 군단을 활용한 '스타 마케팅'과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아이디어 등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현재 홈쇼핑에는 위 두 가지 컨셉트를 모두 충족한 중소 브랜드가 차고 넘친다"고 설명했다.
각종 할인 및 사은품 경쟁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보통의 기업은 제품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거나 사은품을 준다. 각종 홈쇼핑 수수료와 사은 행사까지 하고 나면 실제로 아티스트가 손에 쥐는 돈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다.
이 관계자는 "한국 화장품 생산 기술은 최상에 속한다. 웬만하면 품질은 중상"이라며 "아티스트가 만들었다고 '먹히는' 시대는 지났다. 소비자의 니즈를 빠르게 읽고 움직이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