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까지 3년간 성균관대 축구부 감독 대행을 맡은 설기현 전 감독. 지난달 24일에 만난 설 감독은 더 큰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양광삼 기자
"새로운 도전을 할 때가 됐습니다."
"대학 축구를 왜 떠났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2015년 3월 성균관대 축구부 감독대행을 맡은 그는 작년 10월까지 약 3년 6개월간 팀을 이끌었다. 설 감독은 시즌 중 하루 훈련 시간은 75분을 넘기지 않고, 선수들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는 등 파격적인 지도 방식을 선보이며 대학 축구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다. 부임 기간 성적은 준우승만 3회. 지난달 24일 서울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설 감독은 "부임 4년째가 된 지난해부터 '대학 지도자로 지내며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측의 만류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더 수준 높은 선수들과 더 큰 무대에서 펼쳐 보고 싶어 떠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설기현의 축구 인생은 그야말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유럽 중소리그에서 시작해 빅리그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간 유럽 무대 진출의 개척자였다. 사진=피주영 기자
설기현의 축구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광운대 시절인 2000년 벨기에 주필러리그 앤트워프로 건너가 유럽 생활을 시작한 그는 안더레흐트(2001~2004년·벨기에)와 울버햄프턴(2004~2006년·잉글랜드)을 거쳐 2006년 레딩 유니폼을 입으며 꿈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다. 한국 선수로는 차범근에 이어 두 번째로 한 시즌 두 자릿수 득점(2000~2001시즌 11골)과 한국 선수 최초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2003~2004시즌) 진출 및 득점은 유럽 중소 리그에서 빅리그를 향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던 과정에서 얻은 훈장과 같다. 말 그대로 유럽 무대 진출의 개척자였던 셈이다.
설감독은 "(이)영표 형이 나에게 '개척자'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좋아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벨기에리그에서 곧바로 빅리그의 좋은 팀으로 갈 줄 알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라. 자신감이 넘쳤던 내가 한계를 만나며 느낀 게 많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보다는 마지막인 결과가 좋았다는 말이 더 좋다. 선수로 밟아 보지 못한 정상에 감독으로 가 보고 싶은 꿈이 있다. 유럽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은 경험을 자양분 삼아 결과를 만들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딩 시절 설기현의 모습. 연합뉴스
그러면서 세월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수비수 스몰링은 내가 풀럼에서 뛸 때 2군 선수였다. 어느 순간 맨유에서 뛰고 있더라. 맨체스터 시티의 뱅상 콩파니도 마찬가지다. 안더레흐트에서 뛸 때 유스팀 선수로 전지훈련에 참가했던 기억이 있다. 그 선수들이 주축이고 베테랑 선수가 됐으니, 시간 참 빠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설 감독은 대학 사령탑을 지내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했다. 처음엔 '특별한 감독'이 되고 싶었다. 다양한 전술에 디테일을 추가하고, 그러면서도 조직적인 압박을 펼쳐 상대를 무너뜨리는 꿈을 꿨다. 하지만 감독에게 전술을 짜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소통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설 감독은 "대학에서 지도자를 해 보니 전술은 감독의 역량 중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을 이끌어 나가고 통솔하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히딩크 감독님은 세련된 소통 방식으로 선수단을 탁월하게 장악했다. 요즘 말로 '밀당(밀고 당기기)'의 고수였다. 선수들이 어떻게 하면 더 동기 부여가 되어 더 잘 뛰게 되는 지 잘 알고, 자극을 주셨다. 선수들이 안주할 수 없도록 무언의 경고를 주시는데, 당시 선수들 사이에선 '감독님이 또 시험에 들게 한다'라는 표현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설기현' 하면 2002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 동점골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0―1로 뒤지고 있던 한국은 후반 43분 설기현의 극적인 골로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간 뒤 안정환의 골든골에 힘입어 8강에 올랐다.
설 감독은 히딩크 외에도 좋은 지도자를 여럿 만났다. 그는 "박항서 감독님 역시 선수들의 마음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선수들에게 힘을 줬다. 레딩 시절 스티브 코펠 감독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통해 신뢰를 주신 분"이라고 떠올렸다.
그는 마침내 특별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특별함을 찾아 주는 지도자가 되는 법을 체득했다. 설 감독은 "현대 축구는 빠른 윙백을 선호한다. 감독이 전술을 짜는 데 있어 이런 선수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이 돼서 보니 돌파가 되고 수비도 되는 윙백은 대표팀급에도 찾아보기 쉽지 않더라. 나는 빠르지 않아도 기술이 좋은 풀백이 있다면, 그 선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전술을 짜는 법을 배웠다.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전술을 가다듬고, 팀플레이로 보완하는 게 '설기현식 축구'"라고 했다.
이제 설 감독은 새로운 도전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그는 "유럽에서 10년을 보냈고, 한국에 돌아와 5년을 더 뛰었다. 선수들끼리 전술을 논의하는 유럽 라커 룸 문화가 낯설지 않고, 한국의 정서도 충분히 이해한다.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매년 영국에 가서 직접 축구 흐름을 파악했고, 꾸준히 K리그와 유럽리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연구했다. 내가 가진 경험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설렌다"라며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