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의 도자기는 ‘예스파크’로 모인다.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도자 공예가들이 모인 곳으로 파주 ‘헤이리 마을’이 떠오른 것도 잠시, 덜 다듬어지고 아직 한적한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스파크는 지하철 경강선이 뚫려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가기 쉽다. 이천역보다는 신둔도예촌역에서 차로 12분, 택시비 만원이 안 나오는 거리다.
이천 ‘도자기축제’는 주말인 오는 12일까지 계속되니, 축제 분위기 속 가족 나들이에 제격이겠다.
도자기의 A부터 Z까지…‘예스파크’
지난 2일 예스파크에 들어서자마자 “헤이리 마을 같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너도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각자의 도자기 공방 앞에 테이블을 펼쳐 두고 각기 다른 컨셉트와 철학을 담은 도자기를 판매하고 있었다.
재작년까지 설봉공원 등지에서 열리던 도자기 축제는 지난해 신둔면에 ‘예스파크’가 만들어지면서 축제 장소를 옮겼다. 이천시가 10년간 총사업비 752억원을 투입해 공들여 만든 국내 최대 ‘도자예술촌’이다. 40만5900㎡(12만여 평) 규모의 마을에 220여 명의 공예인이 모여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관람·체험에 쇼핑까지 하루 종일 볼거리·놀거리가 가득하다.
그래서 그릇을, 도자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사계절 내내 이천으로 향하고 있다.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 예스파크 별마을 ‘도자 판매 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후 5시쯤이면 하나둘 문을 닫으니 일찍 방문해야 원하는 그릇을 찬찬히 둘러보고 품에 안을 수 있다.
도자기 그릇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전에 회랑마을에 위치한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다례 체험’을 하기 위해서다. 무료로 진행되는 다례 체험은 도자기 찻잔에 전통차를 시음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천차인연합회 주관 하에 차를 달여 손님에게 권하거나 마실 때 예법인 ‘다도’를 배울 수 있다.
이날은 ‘말차’를 마셔 볼 수 있었다. 말차는 찻잎을 그늘에 말려 잎맥을 제거한 나머지를 맷돌에 곱게 갈아 분말 형태로 만들어 이를 물에 타 마시는 차를 말한다.
뜨거운 물에 말차 가루를 넣은 뒤 거품을 내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작고 한 손에 쥐어지는 찻잔이 아닌 입구가 넓은 ‘대접’과 흡사한 큰 잔에 말차를 담아 마시도록 했다.
이천차인연합회 관계자는 “말차를 마시기 전 다과로 입안을 달게 한 뒤, 마시는 것이 좋다”고 귀띔했다.
차 한 잔의 여유를 만끽했다면, 이제 진짜 ‘도자기’를 겪어 볼 차례다.
이천 도자기 명장 남양도요 이향구 작가의 공방에서 물레를 돌리며 ‘달항아리’를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작가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도자기 만드는 법을 알려 주며 그가 가진 기술을 나누고 있었다.
이 작가의 손이 닿자 단단한 흙점토가 금새 둥근 항아리 모양으로 변했다. 1.5㎝ 정도의 얇은 두께로 점토를 빚는다는 것이 여간 세심한 손놀림이 아니면 불가능해 보였다.
잘 구워진 도자기 위에 각자의 예술혼을 불어넣는 체험도 가능했다. 도자 전용 염료를 붓에 찍어 원하는 그림을 도자기 위에 그려 내면, 이를 전통 가마에 구워 배송해 주는 시스템이다. 갈색빛의 염료가 도자 위에 스며들고, 1250도의 전통 가마에 구워지면 염료는 푸른색으로 변해 우리 머릿속 도자기의 빛을 띠게 된다.
이외에도 목공예·가죽 공예·종이 공예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니 원하는 공방을 찾으면 된다.
또 예스파크 거리에는 입주해 있지 않은 지역 공예인들도 초청돼 저마다 부스를 열어 각지 특산품이나 세계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벤트 부스도 마련돼 있었다. 카페 거리에는 푸드 트럭이 모여들어 축제 분위기를 돋우니 먹거리 걱정도 없겠다. ‘일상의 예술 도자기, 낭만을 품다’
이천에서 도자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효양산과 장동리, 설봉산성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확인할 수 있다. 세 지역에서 대형 항아리와 옹기, 선사 시대 토기 파편, 삼국 시대 각 나라의 기와·토기 파편들도 함께 출토됐고, 적어도 청동기 시대부터 토기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천 도자기는 신비로운 푸른 빛깔과 우아한 선을 지닌 고려청자와 달리 소박하고 꾸밈없는 느낌이다. 도자기의 대표적인 산지로 이름난 이천에는 300여 개의 도자기 가마가 모여 있다.
이천이 도자기 명산지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이나 그것을 굽기 위한 땔나무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외적인 여건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전통 도자기를 재현해 낸 도공들의 장인 정신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자와 백자, 분청으로 이어지는 관상용 전통 도자기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감각의 생활 도자기까지 생산하는 이곳에는 무형 문화재 사기장 41호 한도 서광수 명장이 터를 잡고 있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도자기 만드는 일에 평생을 보낸 서광수 명장은 자신의 호인 '한도'를 딴 ‘한도요’를 세우고 지금은 이천에서 자신을 찾는, 도자를 사랑하는 이들을 맞이한다.
이날은 그의 ‘개요식’, 가마를 열고 작품을 꺼내는 날이었는데 작품은 꺼내지자마자 서 명장의 눈에 차지 않으면 바로 망치로 박살이 난다. 전통 가마에서는 잘 만들어도 순간의 실수로 작품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고, 생각했던 그림의 색채가 나타나지 않는 도자기도 있는 등 가스 가마나 전기 가마처럼 100% 성공하는 것이 아니어서 만드는 데 더욱 힘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의 작품이 전시된 방에 들어서니 역시 가장 눈에 띈 건 ‘달항아리’였다. 문양이 없고 그저 은은한 흰빛을 내는 보름달 모양의 명장표 달항아리는 도자기 본연의 수수함으로 사랑받고 있다.
더 많은 도자기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이천 세계도자센터 ‘세라피아’를 추천한다. 이천 세계도자센터가 소장한 작품들이 전시되는 ‘생각하는 손’ 전시가 열리는 곳이다. ‘우리의 손이 우리의 내면세계를 외부 세계에 표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체로 존재한다’고 표현한 건축가 유하니 팔라스마의 저서 ‘생각하는 손’에서 연결시켜 한국도자재단이 20여 년간 수집해 온 다양한 손의 창조물들을 보여 주는 공간이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꽃밭 ‘꽃들의 변형’, 진짜 가죽 재킷으로 오해할 만큼 정교한 작품 ‘페기의 상의’ 등 흔히 보던 항아리나 그릇이 아닌 도자 예술품들을 만날 수 있다.
도자기 작품을 감상한 뒤에는 형형색색 영산홍이 핀 설봉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