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30대 남성 환자가 급성 담낭염으로 복강경(내시경) 수술을 받던 중 개복수술로 전환해야 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수술을 하던 의료진이 터치 패널에서 '개복 모드'를 누른다. 복강경 수술을 위해 맞춰져 있던 낮은 조도의 불빛이 환한 조명으로 순식간에 바뀌고, 필요 없는 장비는 자동으로 꺼지는 동시에 필요한 장비가 켜진다.
#장면2. 환자들이 병원 이용 시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점은 진료 접수와 수납 등을 위한 장시간의 줄 서기다. 환자가 몰리는 월요일에는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은 예사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으로 진료 예약은 물론이고 처방전을 받고 수납까지 가능해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이 두 장면은 공상과학영화나 미래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병원들이 첨단 ICT(정보통신기술)로 무장한 수술실과 병실·서비스 등을 갖춘 스마트병원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어 가능하다.
스마트병원은 의사와 환자가 빠르고 편하게 치료하고 받을 수 있도록 하면서 인간이 질병과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높여 준다는 점에서 점점 확대되고 각광받을 전망이다. 하지만 ICT에 대한 각종 규제와 기존 기득권 진영의 반발 등으로 스마트병원이 속도감 있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원터치로 수술 장비 세팅, 수술·시술을 동시에…똑똑해진 수술실 최근 병원들이 스마트병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수술실이 최첨단 ICT 수술실로 변하고 있다. 스마트병원을 표방하는 이대서울병원은 지난 2월 올림푸스의 스마트 수술실 시스템 '엔도알파'를 국내 최초로 도입, 스마트 수술실을 열었다.
엔도알파 수술실은 기존 수술실과 달리 의료진이 수술을 하는 데 최적화된 환경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 수술실은 많은 기계와 다양한 조명·처치구가 복합적으로 설치돼 있고, 바닥에는 여러 전선이 얼키설키 널려 있어 수술 종류에 따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엔도알파 수술실은 터치 패널에서 환자 정보와 집도의 이름, 수술 종류 등이 입력된 아이콘을 누르면 조명과 의료기기의 설정이 자동으로 세팅된다. 수술실 내 의료기기와 비의료기기의 사용이 한자리에서 스마트 터치 패널만으로 제어되는 것이다.
또 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촬영(MRI)·환자 의료 기록 등 수술에 필요한 환자 정보를 별도 모니터가 아닌 수술 모니터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에 의료진은 이동 동선과 수술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응급 상황 발생 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집도의와 수술 종류에 따라 의료기기 설정값을 미리 저장해 놓고 한 번의 터치로 불러오는 프리셋 기능으로 의료진과 환자별 맞춤형 수술도 가능하다. 수술 전 준비 시간은 물론 수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이처럼 스마트한 엔도알파 수술실에서 진행된 수술은 지난달 26일까지 총 179건이다. 집도의들은 수술하기에 최적화된 환경과 서비스에 환자 치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엔도알파 수술실에서 첫 집도를 한 민석기 외과 교수는 "스마트 수술실은 기존 수술실에 비해 수술 참여 인원 최소화, 의료진의 동선 최소화로 집도의가 수술에만 집중하며, 응급 상황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민 교수는 또 "오랜 수술 시간에도 벽면에 설치된 블루 글라스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조명 조절이 쉬워 편안한 수술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며 "이런 환경은 집도의를 포함한 의료진에게 안정감을 주며 이는 곧 수술의 안정성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대서울병원은 스마트 수술실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임상통합상황실'도 구축했다. 병원 내 중증 환자의 생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위급한 환자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가능하다.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계명대 동산병원 등 '하이브리드 수술실'을 마련하는 병원들도 있다.
하이브리드 수술실은 뇌동맥류·복부대동맥류부터 동맥경화 등 광범위한 혈관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외과수술과 중재 시술을 동시에 시행할 수 있는 수술실이다.
혈관이 막혔는지 여부를 살펴볼 때 혈관 조영실에서 조영제를 투여하고 방사선을 이용해 보게 되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수술실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하이브리드 수술실에서는 바로 수술 전환이 가능하다.
또 하이브리드 수술실에서는 뇌 속 동맥 혈관 일부분이 부풀어오르는 뇌동맥류도 컴퓨터단층촬영(CT)실에 가지 않고도 치료 도중 조영제를 넣어 실시간으로 혈류를 확인할 수 있다.
회진에 등장한 AI 로봇, 모바일 수납…수술실 밖도 스마트해
수술실 밖에서도 스마트병원을 체감할 수 있다.
지난달 개원한 은평성모병원은 인공지능(AI) 의료 지원 로봇이 실전 배치됐다. 안내 로봇 '마리아'와 회진 로봇 '폴'이다.
특히 회진 로봇은 병동에서 의료진과 회진을 함께하는 로봇으로, 의료진이 ID 카드를 접촉하면 해당 의료진이 치료하는 입원 환자 목록을 제공하고 자율주행 기능을 통해 의료진을 안내한다.
또 회진 시 의료진의 음성을 인식하고 이를 문자로 변환해 실시간으로 의무기록을 자동으로 작성한다. 병원 진료 시스템과 연동해 진료기록·검사 영상 및 결과 등의 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해 의료진의 회진을 지원한다.
환자들의 불만이 가장 많은 병원의 등록 창구도 스마트하게 바뀌고 있다.
디지털 헬스 케어 기업 포씨게이트는 병원 창구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모바일로 진료 예약, 진료 당일 접수·등록을 할 수 있는 '큐어링크' 서비스를 제공한다.
내원객은 별도의 병원용 앱을 설치하거나 회원 가입 없이 카카오톡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모바일로 이뤄지는 안내에 따라 해당 진료실로 정해진 시간에 방문하면 된다. 진료 이후에도 수납이나 처방전 수령을 위해 창구를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처방전을 원하는 약국으로 전송하거나 사전 결제해 약국에서도 별도의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조제약을 수령할 수 있다.
특히 모든 안내가 카카오톡 기반의 대화형 서비스로 이뤄져 있어 상세한 진료 및 검사 상황에 대해 문답으로 바로 안내받을 수 있다.
이 서비스는 현재 한림대 의료원 산하 성심병원·서울대병원·차병원·이화의료원 등 총 15개소에서 제공된다.
카카오톡으로 건강검진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도 나왔다.
디지털 헬스 케어 스타트업인 피어나인의 '메디링스' 서비스는 건강검진 이용자가 기존 병원이나 검진센터에서 검진 이후 카카오톡으로 결과를 수령할 수 있고, 동의 시 추후 재발급 요청을 신청할 수도 있다. 또 종이 문서로 제출하던 문진 표를 사전에 모바일로 간단히 전송할 수 있다.
오는 8월 말에는 블록체인 기반의 '보험금 자동 청구 시범 서비스'가 선보일 예정이다. 삼성SDS가 의료기관·보험사·디지털 헬스 케어 기업과 컨소시엄으로 추진하는 이 서비스는 민감한 개인 의료 정보를 블록체인으로 암호화한 뒤 모바일로 간단히 송수신할 수 있는 것으로, 보험금 수령 절차를 대폭 간소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안광수 포씨게이트 대표는 "스마트병원은 소프트웨어·하드웨어 등 복합적인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발되고 있다"며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한국의 ICT 기술을 기반으로 한 한국형 스마트병원 시스템은 세계 무대에서도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통 3사, 스마트병원 구축 적극 참여
병원의 스마트한 변신에 이동통신사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은 AI 스피커를 통해 환자 생활 공간인 병실을 스마트하게 바꾸고 있다.
LG유플러스는 지난 2월 이대목동병원에 국내 최초로 '스마트 수면병실'을 구축했다. IoT(사물인터넷) AI 스피커와 숙면등·숙면알리미 등이 설치돼 환자의 수면 상태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조명과 TV를 끄고, 설정에 따라 편안한 음악과 수면에 도움을 주는 조명이 켜지기도 한다. 또 실시간으로 실내의 공기 청정 상태와 습도를 모니터링해 최상의 실내 환경을 맞춰 준다.
LG유플러스는 중앙보훈병원에 'U+ AI 스마트병실'도 구축한다. 음성으로 병실 내 IoT 기기와 IPTV를 손쉽게 제어할 수 있고, 노약자·치매 환자 대상으로 AI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활용한 심리·정신 치료 콘텐트를 제공한다.
KT는 모바일 헬스 케어 기업 레몬헬스케어와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병원 서비스'를 공동으로 개발한다. 이 서비스는 진료 예약부터 의료비 수납, 전자 처방전 전달, 증명서 발급 등에 이르는 의료 서비스 전 과정을 모바일 앱 형태로 제공한다.
원격의료는 아직
스마트병원이 발전하고 있지만 각종 규제로 안 되는 것도 많다. 의료진이 멀리 떨어져 있는 환자를 화상 진료하는 등의 원격의료가 대표적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진 간 협진 형태의 원격의료만 허용하고 있다. 환자 옆에 의사나 간호사가 없으면 의료 행위를 할 수 없다. 의료계도 원격진료가 허용되면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이 심화돼 의료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고 질 낮은 서비스가 우려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국내 5G 통신 기술과 ICT 기술을 병원에 접목하면 다양한 의료 서비스가 나올 수 있는데, 여러 규제 때문에 제약이 많다"며 "그래서 현재 병실과 관련한 서비스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