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팔이 길던 까까머리 야구 선수는 어느덧 이마 경계에 흰머리를 감출 수 없는 중년이 됐다. 일간스포츠는 그동안 이 남자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이야기로 꾸준히 지면을 채웠다. 그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알려야 할 가치가 있었다. 반세기를 이어온 스포츠 매체가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가올 50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 의미를 함께 되새길 수 있는 유일한 인물. 바로 선동열(56) 감독이다.
스포츠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꾸준히 등장했다. 해외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고, 불모지에서 기적을 일궜다. 범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종목에서 정상급 플레이어로 평가받으며 자부심을 주는 선수도 있었다.
선 감독을 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볼 순 없다. 현재 야구계의 바통은 메이저리거 류현진(LA다저스)이 쥐고 있다. 그러나 선 감독은 반 세기의 아이콘이자 일간스포츠의 아이콘이다. 중학생이던 1977년에 유망주로 지면 한 쪽에 소개된 그는 40년이 지난 2019년에도 1면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가장 긴 시간 동안 줄지 않은 영향력을 갖췄다. 그사이 신분과 입장이 달라졌고, 성공만큼 좌절을 겪었다. 모두 조명됐고 주목을 받았다. 일간스포츠도 칭찬만큼 질타도 했다.
창간 50주년을 맞이해 선동열 감독을 만났다. 그는 미디어 환경 변화를 몸소 겪은 산증인이다. 가장 친밀한 동반자이자 누구보다 어려운 취재원이었다. 잠시지만 '글'을 쓰는 공통점까지 생겼다. 서로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현재를 직시했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봤다.
<일간스포츠가 선동열을 쓰다>일간스포츠가>
『 야구 선수가 운전 면허를 취득한 이야기가 1면으로 장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신발끈이 끊어져도 기삿거리가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선 감독은 매 순간 주목받았다. 그만큼 취재 경쟁이 치열했고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독자는 즐거웠다 』
- 일간스포츠 반세기 역사에 가장 많은 1면을 장식한 야구인이다. 함께 돌아보고 싶었다. "어느덧 창간 50주년을 맞이했다니 정말 놀랐다. 내가 1972년에 처음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학창시절부터 현역, 지도자까지 걸어온 야구 인생과 함께한 신문이다. '내 나이가 벌써 50대 후반이구나'하고 새삼스럽게 자각도 되더라. 아마 내 나이대 스포츠팬 다수가 같은 생각이실 것 같다. 야구뿐 아니라 모든 종목을 취재한 산증인 아닌가. 종목과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축하한다. 앞으로도 공정한 언론의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 첫 인연은 기억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77년으로 기억한다. 서울에서 개최된 소년 체전에 출전한 뒤 내 이야기가 소개됐더라. 당연히 스크랩도 해놓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1979년에도 '잠재력이 있는 투수'를 주제로 한 번 더 다뤄졌다. 대학생부터는 일간스포츠와의 인연이 더 깊어졌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새삼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현역 시절 선동열의 모습. IS포토 - 영입전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다. 현역 시절 선 감독을 향한 취재 경쟁은 정말 치열했다. "나는 당사자라 얘기가 조심스럽다.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가끔은 왜 그렇게까지 취재 경쟁이 치열했는지 모르겠다."
- 기억이 나는 에피소드를 전한다면. "사소한 일들도 기사화하지 못하면 큰일이 났던 것으로 안다. 다른 신문에 게재된 기사가 소속 신문에 실리지 않으면 경위서까지 썼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개인사로 잠시 귀국했을 때는 광주에서 서울 가는 비행기편에도 동행을 했다. 도착하니까 같은 매체에 다른 기자도 있었다. 한날은 일본 삿포로에서 후배 (故)조성민과 시간을 내서 따로 만났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기자가 매우 섭섭해 하기도 했다. 현지 상주 기자가 아니었고, 잠시 하필 그때 귀국을 했더라. 나도 난감하긴 했다. 이해도 됐다."
- 매체가 마치 에이전트처럼 목소리를 내던 시대다. "맞다. 1980년 대 후반에서 1990년 대 초반에 스크랩을 보면 유독 연봉 관련 기사가 많더라. 1차 제시액, 2차 제시액이 연일 보도가 됐다. 1993시즌을 앞두고는 국내 투수 최초로 연봉 1억 원이 돌파 여부를 취재하기 위해 출장은 온 기자도 있었다. 언론이 기록과 미래 가치를 기준으로 적정 수준을 제시했다."
- 취재 기자와 인간적으로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나. "현역 시절에 소속팀 담당 기자는 야구계 내부 사람이나 동료 같은 존재였다. 함께 이동하고 밥을 먹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사적인 고민까지 나눌 수 있던 기자도 있었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형, 동생이었다. 나는 해외 리그에서 뛰었던 시절도 있었기 때문에 특파원들과도 자주 소통할 수 있었다."
- 스포츠 매체의 취재 문화나 환경의 변화를 모두 겪은 산증인이다. "현역 시절 소통하던 현장 기자들이 이제 한 매체의 대표나 국장이 됐으니 말이다."
-과거와 현재에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내가 현역 시절까지만 해도 아옹다옹하면서도 정이 쌓였다. 구단과 매체의 관계도 그랬던 것으로 안다. 현재 취재 환경은 다르지 않나. 야구인과 언론인이 소통하는 공간이 더그아웃과 그라운드로 한정됐다. 선수 입장에서는 (인터넷 시대다 보니)마음 속 얘기를 언론과 공유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비즈니스로 끝나는 관계가 많아진 것 같다. 물론 달라진 관계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저 시대의 흐름일 뿐이다."
- 선 감독도 변화가 있었나. "일단 지도자가 된 뒤에는 성적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심신 모두 현역 때와 달랐다. 적극적인 스킨십을 하지 못했다. 삼성에서 지휘봉을 잡았을 때와 KIA 감독을 할 때가 또 달랐다."
- 감독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매체도 때로는 냉정했다. 소통도 소원해졌다. "지도자 시절에는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었다. 때로는 받아야 할 비난도 있었다. 그 시점에 더 제대로 상호 소통하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종범과 양준혁에 관한 얘기가 그렇다."
- 은퇴를 종용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나보다 더 스타로 인정받던 후배들이다. 야구를 잘했다. 팀에 가보니 선수는 '이제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데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했다. 물론 내가 가기 전에도 누군가는 총대를 메려고 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슈퍼 스타들이 조금 더 아름답게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떠밀려서 떠나는 선배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은퇴 시점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좋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두 후배 팬들의 마음을 잘 알고, 비난도 수긍한다."
<일간스포츠를 선동열이 읽다>일간스포츠를>
『 취재원이자 독자였다. 자신의 이야기가 쏟아질 때는 민망하기도 했다. 부상을 당했을 때는 당시 신문 매체의 영향력에 감탄했다. 애착이 가는 별칭이 있던 탓에 읽는 즐거움도 있었다. 』
- 일간스포츠의 독자이기도 했을까. "당연히 그랬다. 야구공을 처음 잡았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프로 무대에 데뷔 하기 직전까지는 매일 발행되는 신문이 일간스포츠밖에 없었다. 아마 시절, 학창 시절을 함께한 신문이다. 스크랩도 많이 했다."
- 현역 시절에는 가판대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 일이 많았을 것 같다. "당시에는 일간스포츠가 지역 판을 찍었지 않나. 수도권 판에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지만, 광주 지역 판은 유독 많았던 것 같다. 50회 넘게 1면으로 소개된 시즌도 있었다. 부진한 등판마저도 그렇게 크게 소개되다 보니 민망했다. 내가 입단 6년 차까지는 3피홈런 이상 기록한 시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만루홈런을 맞은 경기가 유독 화제가 됐다. 상대 타자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 선 감독이 아프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야구팬이 들끓었다. 어깨 건초염으로 32⅔이닝 밖에 소화하지 못한 1992시즌 얘기다. "초기에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신문을 본 팬 가운데 치료 방법을 소개해주신 분들이 생겼다고 들었다. 약도 오고, 의사들도 검진을 자원한 것으로 안다. 덕분에 별별 치료를 다 받아 봤다. 혈도술의 대가라는 분을 찾아 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마치 내 몸의 통각점을 높이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듬해 완전히 나았는데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더라."
- 사소한 일마저 화제로 만들던 스타였다. 당연히 수식어나 별명도 많았다. 기자의 작품도 있었다. "많다. 멍게도 있고 앙팡맨(호빵맨)도 있다."
- 가장 애착이 있는 별명은. "아무래도 무등산 폭격기다. 고향에서는 의미가 깊은 산이다. 그리고 내 투구 모습이 연상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폭격기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중(重)폭격기'였는데 이후 앞 음절이 빠졌다. 신인 시절부터 나온 별명이니 신문을 볼 때마다 자주 접하기도 했다."
- 일본 진출을 앞둔 1995년 11월, 길거리에 있는 가판대는 연일 인산인해였다. "언론사에서 일단 '일본을 보내도 되느냐'는 질문으로 여론 조사를 했다. 야구팬 80%가 찬성했다. 심지어 광주 지역에서도 60%가 넘었다. KBO가 내심 잔류를 원했던 것 같지만 대세가 그랬다."
- 스포츠 전문지 사이 보도 전쟁도 있었다. 일간스포츠에는 뼈아픈 기억이다. "당시 일간스포츠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가야 한다고 썼다. 확신하며 쓴 보도도 있던 것으로 안다. 다른 매체도 그랬다. 심지어 야구팬도 90% 이상 일본 리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요미우리를 가야 한다고 했다. 스포츠서울만 주니치였다."
- 설(說)은 무성했다. "당시에 박건배 해태 구단주가 지금은 돌아가신 구본무 LG 회장님과 인연이 있었고 내 문제를 상의하셨다. LG는 주니치와 자매결연을 한 구단이었다. 구 회장님이 주니치를 추천 하셨고, 박 구단주도 주니치행을 지시하셨다. 그러나 실무진은 고민이 있었다. 요미우리가 임대료를 더 부른 것이다. 당시 모기업의 사정이 좋지 않았던 터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던 것 같다. 실무적인 사안이 있으니 설도 많았을 수 밖에."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선동열.. 중앙포토 - 독자이자 당사자다. 기사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팀 사정도 감안해야 했다. 주니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고야에서 진행된 한·일 슈퍼 게임 6차전이 끝나고 이토 당시 주니치 단장과 식사를 했다. 당시에는 고민을 하던 시기다. 이동을 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에게 통역을 거쳐서 '앞으로 주니치에서 뛸 수 있는 분이다'고 소개하셨다. 기사님이 '꼭 오라'며 덕담을 하신 뒤 택시비까지 받지 않으셨다. 광주에 있는 것처럼 정감이 갔다.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야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디어 전쟁은 있었지만 이미 마음은 주니치로 향했던 것 같다. "그랬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봐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요미우리는 야수 출신 나가시마 감독이었다. 주니치는 투수 출신 호시노 감독이었다. 아시다시피 입단 첫 시즌은 실패했다. 그러나 호시노 감독이 내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고, 발휘하도록 배려했기에 마무리투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요미우리는 명성에 걸맞은 몸값에 주지만, 못하면 가차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