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내 네티즌의 글이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축구를 영상이 아닌 문자중계로 지켜봐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선수들이 자명종 시계까지 챙겨간게 뒤늦게 알려졌다. 최첨단시대 2019년에 한반도에서 벌어질 실화다.
한국남자축구대표팀은 15일 오후 5시30분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H조 3차전을 치른다. 북한 당국의 비협조로 한국 취재진과 응원단은 물론 TV 생중계도 없이 열린다. 국내축구팬들은 아시아축구연맹(AFC) 홈페이지 문자중계에 의존해야한다. 교체, 경고 등 제한적인 정보만 제공된다. 우리 대표팀은 평양에서 1박2일간 사실상 세계와 단절됐다. 대표팀은 지난 14일 중국 베이징을 출발해 오후 4시10분경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지도 못한채 곧장 김일성경기장으로 이동해 기자회견과 훈련을 가졌다.
애초 대한축구협회는 현지 파견된 직원을 통해 PC 메신저로 현장 상황을 전하려했다. 하지만 축구협회는 14일 오후 10시38분경에야 한국 기자단에 사진 2장만 보내왔다. 화질이 좋지 않은데, 이마저도 AFC 관계자를 통해 받았다.
14일 자정까지 파울루 벤투 한국 감독의 기자회견 내용은 깜깜 무소식이었고, 다음날 오전 8시에야 전달됐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현지 경기장에서 PC 카카오톡과 왓츠앱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숙소인 고려호텔로 이동해 이메일로 전송하느라 하루 늦게 전달됐다”고 했다.
현지 축구협회 직원과 15일 0시30분 이메일로 연락이 닿았는데, 대표팀이 평양에 입성한지 무려 8시간 만이다. 만약 AFC가 아니었다면 몸값 1000억원이 넘는 손흥민(27·토트넘)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은 사실상 행방불명 신세가 될뻔했다.
전날 대표팀은 일정이 지연돼 공항에서 오후 6시40분에야 출발했다. 예정보다 1시간25분 늦은 오후 8시25분부터 김일성경기장에서 50분간 훈련했다. 선수단 버스가 평양 시내로 이동하는 내내 50㎞ 안팎의 저속으로 달렸다.
기자회견장에 북한기자 5명만 참가했는데, 그들이 기자인지 정부관계자인지 알 수 없다. 평양에 주재하는 신화통신, AP통신 등 외신 기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북전 영상은 한국대표팀이 돌아오는 17일에야 녹화중계가 가능할 전망이다. 북한 측은 영상 DVD를 한국이 출발하기 전에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중계영상인지, 경기분석용 영상인지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 14일 대한축구협회 인사이드캠을 통해 한국 선수들이 자명종 32개를 챙겨간게 뒤늦게 알려졌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 휴대폰을 대사관에 맡겨야 한다. 아침 알람을 위해 자명종 32개를 사서 한개씩 나눠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27세 미드필더 이재성(홀슈타인 킬)은 “중학교 때 주장이었는데 휴대폰이 없어 이런거 하나로 깨웠다”고 말했다.
15일 오후에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축구협회는 오후 1시쯤 “5만석 중 예상관중은 4만명이다 이용은 무릎통증으로 제외됐다”고 전했다.
한국은 지난달 10일 아시가바트에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월드컵 2차예선 1차전에서 2-0으로 승리했다. ‘중앙아시아의 북한’이라 불리는 투르메니스탄은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61)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TV 생중계와 응원을 흔쾌히 수용했다. 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한은 이번 남북전을 통해 전세계에 폐쇄성을 재확인시켰다.
영국 BBC는 15일 오전 “남북전은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더비”라며 “생중계·한국팬·한국기자도 없다. 북한에 있는 외국인 관광객조차 경기관람을 불허했다”고 전했다. 이어 BBC는 “지난해 남북은 스포츠를 통해 냉각관계를 깨며 상당한 진전을 이뤘지만 현재는 좋지 않다”고 전했다.
지난해 2월 평창올림픽에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이 구성됐고, 대규모 북한 응원단이 방한했다. 하지만 불과 1년8개월 만에 한국은 평양 원정을 ‘3무(기자단·응원단·중계)’로 치르는 신세다.
문재인 대통령은 2032년 남북 올림픽 공동개최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깜깜이 월드컵 예선은 문정부 짝사랑 대북정책이 빚은 참사다. 핫라인을 설치했다던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월드컵 생중계하라는 전화 한통 안한다”고 지적했다.
2023년 여자월드컵 남북공동유치를 추진하는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이날 경기를 관전할 예정이다. 네티즌들은 “평창 때 환대해주면 뭐하나, 정작 우리는 찬밥신세인데”, “축구 한 경기로도 이러는데, 2032년 올림픽은 어떻게 공동개최를 추진하겠냐”고 지적했다.
임재천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북한은 지금 당장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만들어봐야 얻을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짧은 직항로는 물론 응원단과 중계도 허락하지 않는는데, 북한이 한국선수단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꼭 이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며 “올림픽 공동개최 여부도 10년 이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불확실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