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8부(부장판사 심재남)는 12일 오전 10시, 배우 문성근과 김규리, 개그우먼 김미화 등 문화예술인 35명이 이명박(78) 전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 원세훈(68) 전 국정원장을 상대로 낸 1억8000만원 손해배상 소송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이는 소장 접수 후 약 2년만에 열린 재판이다.
이날 재판에는 원고 측 대리인과 피고인 대한민국, 이명박 전 대통령, 원세훈 전 국정원장 측 대리인만 출석했다.
원고 측 김필성 변호사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소송기록 열람 등사를 요청했으나 법원이 허가했음에도 '별도 소명을 해야 한다'며 등사를 거부 중이다. 법적 근거와 소명을 요구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구두로도, 공문으로도 답이 없다"며 "만약 끝까지 거부한다면 행정절차에 따라 공문으로 거부 취지를 통보해달라고 한 상태다"고 말했다.
이어 원세훈 전 원장이 MBC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것을 포함해 3개 사건의 공소장, 사건 정보 등에 대한 구석명 신청을 했다. 정부 측 대리인은 '손해가 발생했다는 불법행위를 구체적으로 특정해달라'고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측에 "국정원에서 작성한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인데, 국정원에서 후속 조치된 바 있냐" 물었고, 법무부에서 선임한 변호인은 "국정원 내에서 따로 조치된 건 없다. 수사를 개시해 진행 중이지만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고 답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원장 측은 특별한 입장을 언급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특정하고 증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불법행위 사실이 특정되고 그에 관한 증명이 돼야한다"고 전했다.
김필성 변호사는 재판 후 "검찰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소극적 태도로 재판이 지연됐냐"는 질문에 "이런 사건은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블랙리스트에 이름만 올라도 불법행위가 인정될 것이다. 이름이 오른 후 구체적으로 어떤 나쁜 행동이 있었는지 알고자 문서송부촉탁을 했다. 재판 내용을 보면 법원이 사실상 검찰보다 무력하다"고 토로했다.
35명의 문화·예술인은 지난 2017년 11월 28일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 소장을 제출했다. 1인당 위자료 500만원을 청구했으며, 해당 사건은 판사 혼자 판단을 내리는 단독 재판부보다 판사 3명이 합의를 진행하는 합의부에서 심판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여겨 민사합의18부로 배당됐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일명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화나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 무산, 지원 거부, 프로그램 출연 배제 등 차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개혁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9년 국정원은 기조실장 주도로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구성해 여론을 주도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 연예인 등에 대한 압박 활동을 펼쳤다. TF는 소속사 세무조사, 프로그램 편성 관계자 인사조치 유도 등 전방위적 퇴출 압박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소송 제기 당시 문화·예술인들은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문화예술인들의 밥줄을 끊었다"며 "국가의 잘못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