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소방수 하재훈(29)은 '천생 마무리감'으로 평가 받는다. 위기에서 긴장하는 법이 없고, 실점을 한 뒤에는 "내가 아니라 누가 올라왔어도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금세 털어 버린다. 야구는 '멘털 게임'이라는 명제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실제로 '강심장'은 마무리 투수 하재훈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그는 투수로 전향한 첫 해이자 KBO 리그 데뷔 시즌인 올해 무려 36세이브로 구원왕에 오르면서 2002년 조용준(현대·28세이브)을 넘어 KBO 리그 역대 데뷔 시즌 최다 세이브 신기록을 세웠다. 또 SK 구단 역대 최다 세이브(2003년 조웅천·2012년 정우람·이상 30세이브)도 가뿐하게 넘어 마무리 투수로서 기념비적인 역사를 남겼다.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최근 끝난 2019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대표팀에 뽑혔고, 결승전을 포함한 4경기에 등판해 각 1이닝을 던지면서 무실점으로 안정적인 피칭을 하고 돌아왔다. 부동의 국가대표 소방수였던 오승환(삼성)의 뒤를 이을 차세대 클로저로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큰 경기와 위기에 모두 강한 면모를 유감없이 뽐냈다.
그러나 하재훈은 '타고난 강심장' 얘기가 나오자 "그런 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강심장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다. '우왁' 하고 놀래키면 누구나 다 놀라게 돼 있고, 나도 놀란다"며 "난 심장이 약하다. 무서운 것도 싫어하고, 벌레도 무서워한다"고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하재훈의 지론에 따르면, 사람이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거나 긴장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대상의 위력이나 실패했을 때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다.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귀신이 무서운 거고, 벌레도 실제로 물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무서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풀어 얘기하면, 강심장은 결국 '경험'이 만들어 준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재훈의 생각은 이렇다. "무서운 것을 이미 한 번 봤는데 다음에 또 보면, 이전보다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에서 무엇이 어떻게 나올 지 알고 있으니 무서워도 참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과 노하우가 생기지 않나. 경험이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물론 이런 대범한 마음가짐 역시 강심장인 선수들만 품을 수 있는 생각임은 분명하다.
투수 전향 첫 해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모든 사람이 "하재훈에게는 올해보다 내년이 진짜 중요한 해"라고 입을 모은다. 첫 해부터 세이브왕에 올랐으니 모두의 기대치가 더 높아졌고, 두 번째 시즌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향후 소방수로 롱런할 수 있을지 여부도 달려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하재훈은 이번에도 다시 고개부터 저었다. "왜 다들 내년이 더 중요하다고 하느냐. 그러면 내가 더 긴장하지 않느냐"고 웃으면서 "내년도 중요하지만, 매 순간이 모두 중요하다. 중요한 만큼 내가 더 잘하고, 중요한 일을 내가 더 잘했으면 좋겠다"고 '우문현답'을 내놨다.
계획도 확실하다. 절대 숫자로 표현되는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흔들리는 것을 더 경계해서다. "그냥 하나씩 하나씩 열심히 하다 보면, 남들이 보통 세우는 목표 위에 내가 서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야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대신 '발전'은 꾀한다. "올해 못한 것들을 내년에는 좀 더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올해는 투수로서 노하우가 덜 쌓인 단계라 '연투가 힘들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던 게 스스로 마음에 걸렸다. 시즌 후반 들어 눈에 띄게 페이스가 떨어지고 실점이 늘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도 정말 연투가 잘 안 됐고, 힘들었다. 이것도 결국 확실하게 노하우를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라며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올해 깨달았으니 내년부터는 2경기, 3경기씩 연투하면서 이기는 경기는 무조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올 겨울은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한 준비 단계다. 하재훈은 "겨울은 선수에게 항상 중요하다. 오히려 시즌 때는 체중에 상관 없이 많이 먹고 편하게 지낸다"며 "겨울에 혹독하게 훈련하는 스타일이다. 올 겨울에도 다이어트와 몸 만들기를 시작해 약 10kg 정도를 감량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시즌 마운드에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의 공을 던지기 위한 웜업과 다름없다. 그는 "준비를 잘 해놓고 준비한 만큼만 하자는 생각으로 늘 임해왔다"며 "올 겨울에 준비를 잘 해서 내년 시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려고 한다"고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