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배구 대표팀 주장 신영석(33·현대캐피탈)의 별명은 '배구대통령'이다. '농구대통령' 허재 전 KCC 감독을 닮은 외모에 2017~18시즌 MVP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갖춰서다. 여자배구 대표팀 주장 김연경(31·터키 엑자시바시)의 별명은 '배구여제'다. 말 그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황제, 공존할 수 없는 이들이 똑같은 꿈을 바라보고 있다. 2020 도쿄올림픽 본선 티켓이다.
대한배구협회는 22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올림픽 아시아지역예선에 출전하는 남녀배구 대표팀 기자회견을 열었다. 남자 대표팀은 임도헌 감독과 신영석, 여자는 강성형 코치와 김연경이 참석했다. 이탈리아 리그 부스토 아르시치오 지휘봉을 동시에 잡고 있는 여자팀 감독 스테파노 라바리니는 28일에 입국할 예정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경기 방식은 남·여 동일하다. 2개조 조별리그(남자 8개, 여자 7개)를 치른 뒤 각조 1·2위가 준결승에 오른다. 이후 크로스토너먼트를 통해 우승한 팀에게만 도쿄행 티켓이 돌아간다. 남자부는 중국 장먼(7~12일)에서, 여자부는 태국 나콘라차시마(7~12일)에서 열린다. 남자부는 A조에서 호주·인도·카타르를 상대하고, 여자부는 B조에서 카자흐스탄·이란·인도네시아를 상대한다. 두 팀 모두 조별리그 통과는 무난한 가운데 남자는 아시아 최강 이란, 그리고 중국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홈팀 태국과 결승에서 만날 것으로 예상된다.
남자 배구는 세계랭킹 24위다. 냉정하게 말해 국제대회 경쟁력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김세진·신진식·방신봉·이호·최태웅 등이 활약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본선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올해는 세계 상위팀이 참여하는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올림픽 대륙간예선에서도 3전 전패를 기록했다. 주장 신영석은 남자 배구에 대한 반성의 말부터 꺼냈다. 그는 "20년 동안 문도 못 두드려서 절박한 심정이다. 2주 동안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20년 동안 앞으로 더 못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후배들한테도 미안하고, 선배들에게도 죄송스러웠다. 한국 남자 배구가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신영석의 각오는 단단하다. 신영석은 "선수들도 안된다는 의식을 깨고 싶어한다.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주장으로서 최선을 다 해 준비해 보겠다"고 했다. 신영석의 자신감은 올해 9월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덕분이다. 당시 한국은 박철우, 문성민, 한선수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영석은 베스트 7(미들블로커)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잘 이끌었고, 신예들이 힘을 보태 4위에 올랐다.
특히 준결승 이란전은 몇몇 오심이 없었다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는 경기였다. 지금의 이란은 세계최정상권에 머물렀던 이란이 아니다. 임도헌 감독도 "이란의 높이와 힘은 우리보다 앞선다. 그렇다고 못 넘을 팀은 아니다"라고 했다. 신영석은 "이란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올해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4위)을 보며 느낀 게 있다. (일본이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한 것처럼)우리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신영석은 "석석 듀오(곽승석-정지석)를 정말 좋아한다. 리시브와 수비에서 우리 팀은 장점이 있다. 아시아선수권 때 8강도 못 갈거라고 예상했는데 힘들지만 이겨냈다. 둘이 이번에도 잘 해줄 것이고, 나도 잘 이끌겠다"고 했다.
신영석은 "모든 분들이 '남자 배구 대표팀은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대표팀의 현실이란 걸 느끼고 있다. 편견과 시선을 바꾸기 위해 아시아선수권에서 노력했다. 이번 대회도 많이 주목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영석은 "올림픽이라면 선수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무대다. 이제 제가 (우리 나이로)서른 다섯 살이 된다. 저에겐 정말 마지막 기회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꿈을 이루고 싶다"는 간절함을 드러냈다. 상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는 여자팀도 편한 마음은 아니다. 김연경은 "기다렸던 올림픽 예선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걱정과 설렘이 함께 있다"며 "태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잘 준비해서 목표를 이루겠다"고 밝혔다. 이어 "솔직히 부담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준비를 잘 하고 있다"고 했다. 김연경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님이 오시면서 우리 나라 배구가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거 같아서 좋았다. 비시즌 기간 많은 대회를 통해서 브라질과 같은 세계적인 강호들을 꺾기도 했다. 자신감도 얻었다"고 했다. 김연경은 리그 경기를 치르는 도중에도 틈틈이 동료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사실 김연경의 몸 상태는 완벽하지 않다. 터키 리그에선 그나마 체력 안배를 하긴 했으나 올림픽 휴식기 때문에 평소보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이다. 핀란드 원정을 시작으로 중국에서 열린 세계클럽선수권에 출전했고, 터키로 돌아와 바키프방크와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폴란드 우치에서 챔피언스리그 경기까지 치렀다. 11월 26일부터 입국 전까지 무려 4개국에서 8경기를 했다. 김연경은 "솔직히 피곤하다. 아직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다. 빨리 몸을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주장이자 에이스인 김연경의 책임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김연경은 이미 두 번의 올림픽(2012 런던 4강, 2016 리우 8강)을 경험했다. 런던 대회에선 메달을 따지 못했음에도 MVP에 오를 정도로 활약했다. 하지만 메달이란 목표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번 대회가 소중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번 대회 이후 김연경이 태극마크를 더 달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연경은 올림픽 본선에 나갈 것을 염두에 둔 목표에 대한 질문에 "예선전을 앞두고 있어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간다면 꼭 시상대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