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손연재가 서울 한남동의 스튜디오에서 일간스포츠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민규 기자
"손연재의 정체성이 곧 리듬체조였던 것 같아요."
'요정'에서 '대표님', 그리고 '선생님'이 됐지만 정체성은 하나로 이어진다. 12월의 어느날 서울 한남동 리프스튜디오에서 만난 손연재(25)는 자신의 정체성을 '리듬체조'라고 규정지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어느덧 3년째, 하지만 여전히 손연재의 삶은 리듬체조에 맞닿아 있다.
공식 은퇴 선언은 2017년 2월 18일이었지만, 사실상 그가 매트에서 내려온 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이후. 그 뜨거웠던 여름 이후 손연재의 온도는 줄곧 평균에 머물러 있었다. 한때 '리듬체조 요정'이라 불렸던 손연재는 은퇴 후 선수라는 이름표를 벗어던지고 2년 넘게 조용한 일반인의 삶을 보냈다. 학교도 다니고, 책도 읽고, 춤이나 꽃꽂이나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선수 시절에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경험을 쌓고 몇 번쯤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렇게 은퇴 후의 해방감을 만끽한 손연재는 어느 순간 결국 다시 리듬체조의 세계로 돌아왔다.
◇쉼표 다음엔 결국, 리듬체조
손연재를 만난 건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리프 스튜디오에서였다. 손연재는 올해 3월 문을 연 이 리듬체조 아카데미에서 '손 대표'이자 '손쌤'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모처럼 다시 선수 시절을 반추한 손연재는 "은퇴가 너무 빠른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데, 리듬체조 선수로서 그렇게 빠른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은퇴한 것도 아니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까지 차근차근 마지막 무대다,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했던 시간이 있었다"고 3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은퇴 후에 공허했던 시간들도 물론 있었다. 2012년 이후부터 4년 동안 리우만 바라보고 은퇴를 준비해온 것 같다"고 말을 이은 손연재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더 이상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응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일상적인 생활도 보내고 진로 고민도 하고. 그러다가 리듬체조 관련된 일로 돌아와서 리프 스튜디오를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물론 고민의 시간은 길었다. 손연재 앞엔 여러 갈래 길이 펼쳐져 있었고, 몇 차례 방송 출연으로 많은 이들은 그가 연예계로 진출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연재는 손사레를 쳤다. "성격이 방송에 안 맞는다"고 고개를 저은 손연재는 "은퇴하고 다른 또래들처럼 똑같이 진로 고민을 하고, 뭐하고 살아야 할 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웃었다.
연예계를 선택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뒤늦게 겪은 정체성 혼란 때문이었다. '리듬체조 선수'로 살아온 손연재는 은퇴 후에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방송에 나서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시도는 해봤는데, '리듬체조 선수'가 아닌 상태에서 방송에 나가니까 호칭도 애매하고 여러모로 혼란스럽더라"는 것.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로 당연하게 방송을 하는 것보다 뭔가 이루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렇게 방송 출연을 멈추고, 일상을 영위하며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국 리듬체조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게 됐다. 평생 리듬체조만 해온 손연재가 인생 제 2막에서도 리듬체조와 함께 하기로 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물 다섯 손연재의 인생 2막
스튜디오 한편에 마련된 작은 집무실에는 손연재 대표의 명패가 놓여있고, 명함에도 같은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스튜디오 곳곳에는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쓴 아이들의 손글씨 편지와 함께 수강생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1년차 대표이자 선생님인 손연재는 아직 모든 것에 '적응 중'이라고 했다. "선수 손연재와 달리 일반인 손연재는 사회생활하는 사람으로서 남들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더라"고 말한 손연재는 "단순 업무라던가 일처리라던가. 스튜디오 경영하면서 매니지먼트 자료를 만들고 엑셀을 다루는 것도 좀 어려웠다"며 웃었다.
그의 말처럼 선수로 살던 때와 선생님, 그리고 한 회사의 대표로 살아가는 지금은 매일매일이 천양지차다. 그 사실을 가장 크게 깨달은 건 국제 주니어대회인 리프 챌린지컵을 개최하면서다. 1회 때인 지난해에는 후원사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사비를 들였고, 올해도 직접 나서 투자자를 유치하는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손연재는 "선수 때는 대회 출전해서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그 뒤의 모든 것들을 해야하는 만큼 많이 배우고 몰랐던 것도 알아가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소속 매니지먼트 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 진행하는 만큼 시행착오도 있고, 난관에도 직접 부딪혀야 하는 상황이지만 손연재는 "그런 것도 다 일종의 도전"이라며 미소를 띄웠다.
리프 스튜디오를 열고, 리프 챌린지컵을 개최하게 된 배경에는 리듬체조 선수로서 손연재가 겪고 느꼈던 것들이 바탕이 됐다. "지금 선수 한 명을 키운다고 해도, 나중에 이 선수가 은퇴하고 나면 똑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리듬체조를 체험하게끔 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손연재는 대표적인 인기 종목인 축구를 예로 들었다. 손연재는 "축구만 해도 어릴 때부터 경험해 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선수들이 뛰는 걸 보면서도 잘한다, 못한다 하는 걸 알고 또 마음이 가는 것 아니냐"며 "그런 것처럼 리듬체조를 더 친숙하게 만들고,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다 보면 선수층도 두터워질 수 있을 거고, 시스템도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악플'에 울었던 시간들… "앞으로 더 많이 바뀌었으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손연재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악플' 얘기였다. 손연재는 가장 많은 악플에 시달린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악플에 시달린 선수다. 가히 선수 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 악플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운동 선수로는 드물게 2014년 악플을 단 네티즌을 고소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악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악플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왔지만 손연재의 표정은 담담했다. "선수 때는 말 한 마디를 해도 예민하게 돌아오기 때문에 인터뷰에서도 감정을 싣지 않고 중간 답변만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문을 연 손연재는 "'열심히 하겠다',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는 답변을 하면 금메달 딸 것처럼 기사가 나는 것이 힘들었다. '연습 안하고 촬영이나 한다' 이런 이야기들도 많아서 누군가 알아보고 관심을 주는 것이 싫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고 돌이켰다.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사가 되고 악플이 달리는 것에 익숙해지기란, 그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다. 은퇴 후 잠잠해지는 듯 했지만, 2016년 11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당시 구속된 차은택씨가 2014년 만든 늘품체조 시연회 행사에 손연재가 참석한 것을 두고 네티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대한체조협회에서 공문이 와 참석했고, 내용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앞서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던 손연재는 "은퇴 후에 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악플과 관련해 늘 뭔가 많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방송 출연은 물론이고, 다시 리듬체조로 돌아와 대중 앞에 선다는 결심을 하는데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연재는 생각보다 의연했다. 손연재는 "지금 와서 반대로 생각하니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데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할 때도 있다. 좋은 취지에서 많은 분들과 얘기하고, 리듬체조가 더 많은 분들께 사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나가면 좋은 반응이 올 것이라 믿는다"는 말로 악플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제는 조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연재는 "사실 악플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프라인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막상 찾아보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소수인 경우도 많다"며 "이전까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이런 사람들이 (악플을)당연히 받아 들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요즘 많이 달라졌다. 앞으로 더 많이 달라지고, (악플 문화가)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내년도, 앞으로도 계속 리듬체조와 함께
스스로도 '인생 2막'으로 이름 붙이긴 했지만 새로 시작한 삶은 아직 어려운 부분이 많다.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손연재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다. "아직도 절 무한도전 나왔던 7년 전의 손연재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말한 그는 "만으로 스물 다섯이면 어린 나이가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절 보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직도 애처럼 보시는 분들이 많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선수일 때는 몰라도, 대표라는 명함을 내밀었을 때 상대가 자신을 마냥 어리게 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고민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이제 조금씩 '일하는 법'을 알 것 같다는 손연재는 내년을 바라보며 더 큰 목표를 그리고 있다. 코앞으로 다가온 2020년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낼 예정이다. 일단 내년에도 리프 챌린지컵이 우선이다. 손연재는 "한국에서 열리는 첫 국제대회이자 꾸준히 앞으로도 진행해나갈 대회로 만들고 싶다. 앞으로 대회 규모가 더 커져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올 수 있는, 또 오고 싶어하는 대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선수도 키워내고, 리프 챌린지컵에 나왔던 선수가 나중에 올림픽에 나가는 일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감도 슬쩍 곁들였다.
그 외에도 리듬체조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마스터 클래스나 워크숍, 지방 원데이 클래스 등 여러 가지 행사도 진행할 계획이다. "올림픽에서 저 하는 것만 보신 분들에겐 아무래도 리듬체조가 '선수들만 하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할 것"이라고 말한 손연재는 "사람들이 리듬체조를 더 쉽게 생각할 수 있기 위해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각오를 전했다. 리듬체조에 대한 관심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동안 멈춰뒀던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분명한 건 "리듬체조는 내 정체성"이라는 말 그대로, 앞으로도 손연재의 삶은 끝까지 계속 리듬체조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