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32·토론토)에게도, 한국 야구에도, 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에도 모두 역사적인 2019년 12월이었다.
류현진은 지난 28일(한국시간) 토론토와 4년 총액 8000만달러(약 929억원)에 사인해 새 팀 입성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지 8번째 시즌만에 연 평균 2000달러를 받는 선수로 등극한 것이다. 토론토 구단은 류현진이 프로 생활 14년(한화 7년+LA 다저스 7년) 동안 줄곧 달았던 등 번호 '99'를 유니폼에 새겨 선사하면서 환영 의사를 아낌 없이 표현했다. 이날 토론토 공식 홈페이지와 공식 SNS는 모두 류현진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도배됐을 정도다.
몸값부터 등 번호까지, 모든 게 역사다. 류현진은 토론토 구단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FA 계약을 한 투수로 남게 됐다. 토론토는 이전까지 2006년 A.J. 버넷을 영입하면서 5년 5500만달러를 쓴 게 최고 지출이었다. 류현진이 총액(8000만달러)과 평균 연봉(2000만달러) 모두 버넷을 넘어섰다. 토론토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러셀 마틴(5년 8200만달러)과 버논 웰스(7년 1억2600만달러)에 이은 역대 세 번째 규모에 해당한다.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역사도 물론 다시 썼다. 이미 올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손에 넣고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최초로 1위표를 받아 2위를 올랐던 류현진이다. 이번엔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지난 2001년 12월 텍사스와 계약하면서 받은 5년 6500만달러를 넘어 역대 한국인 투수 프리에이전트(FA) 최대 규모 계약 기록도 새로 썼다. 또 연 평균 금액만으로는 역대 한국인 FA를 통틀어 최고액이다. 2013년 12월 외야수 추신수가 텍사스와 7년 1억3000만달러에 사인했지만, 연 평균 금액은 1857만달러였다.
류현진이 다시 쓰게 된 등 번호 99번도 또 다른 발자취로 남는다. 1977년 창단한 토론토에서 등 번호 99번을 달게 된 선수는 류현진이 처음이다. 이전까지 토론토 소속 빅리그 선수가 쓴 등 번호 가운데 가장 큰 숫자는 1991년 르네 곤살레스가 달았던 88번이었다. 류현진이 구단 사상 첫 '99번 선수'로 기록되는 셈이다.
캐나다 스포츠 역사에서 99번은 아주 특별한 숫자이기도 하다. 아이스하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웨인 그레츠키의 등 번호라서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는 2000년 그레츠키의 99번을 현재까지 유일한 전 구단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의 42번을 전 구단 영구 결번한 것과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제 류현진이 캐나다에서 야구로 99번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갈 차례가 온 것이다.
류현진의 계약을 성사시킨 슈퍼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는 입단 기자회견에서 "아마 류현진은 캐나다에서 뛴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며 "캐나다가 99번을 LA에 빌려줬다가 류현진이 캐나다로 오면서 다시 99번을 가지고 왔다"고 재치 있는 농담을 했다. 캐나다 에드먼턴 오일러스에서 뛰던 그레츠키가 1988년 LA 킹스로 트레이드됐던 상황까지 비유한 유머다.
무엇보다 류현진은 이적과 동시에 팀의 '기둥'이 됐다. 토론토는 올해 67승 95패(승률 0.414)를 기록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4위에 머물렀다. 취약한 선발진이 부진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찰리 몬토요 감독이 올 시즌 선발 투수로 기용한 선수 수만 21명에 달할 정도다. 여기에 불펜도 다른 구단에 비해 강하지 않고, 수비도 탄탄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팀의 중심을 잡아 줄 베테랑 선수가 많지 않다.
따라서 메이저리그 평균자책점 1위 투수 류현진이 토론토 유니폼을 입게 됐다는 소식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큰 기쁨을 안겼다. 특히 토론토는 이제 막 빅리그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젊은 선수들이 많은 구단이라 류현진이 선수단 전체에 좋은 롤 모델이 돼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전력이 약한 팀의 절대 에이스'는 류현진이 KBO 리그에서 이미 익숙했던 역할이다.
로스 앳킨스 토론토 단장은 "토론토 선수들과 직원 모두 류현진 영입 소식을 반겼다"며 "연말에 문자 메시지 등으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눴는데 류현진 계약 덕에 정말 연휴 같은 (즐거운) 분위기로 넘쳤다"고 했다. 또 "시즌이 끝나고 선발진을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부터 계속 지켜봤던 선수"라며 "류현진은 보면 볼수록 뛰어난 투수다. 4개의 구종(직구, 체인지업, 컷패스트볼·슬라이더, 커브)을 자유자재로 원하는 곳에 던진다"고 설명했다.
몬토요 감독 역시 그 누구보다 격한 환영 인사를 전했다.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가운데 한 명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팀이다. 류현진이 우리 팀에 와서 정말 행복하다"며 "류현진 같은 선수와 계약했다는 것은 우리 팀원 모두가 원하는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류현진이 오면서 이제 젊은 선수들에게 몰렸던 부담이 조금 줄었다"며 "류현진이 우리 에이스가 되면서 그게 가장 좋은 점이다. 그가 좋은 피칭을 한다면, 모두 그 뒤를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시에 토론토는 오랜 기간 쌓였던 '선수에게 투자하지 않는 구단'이라는 이미지도 벗게 됐다. 토론토 팬들이 류현진 영입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기대도 하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며 기뻐한 이유다. 1년 전 토론토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던 보라스도 류현진을 향한 구단의 열정을 보고 태세를 전환했다. 보라스는 "윈터미팅부터 토론토가 류현진 영입에 무척 적극적이었다"며 "류현진이 어떤 투수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고, 류현진 역시 자신이 토론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지 이해하고 있다. 기존 젊은 선수들과 류현진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14년 전 전설적인 선배 투수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던 한 신인 투수는 지금 이렇게 구단 수뇌부부터 감독 그리고 후배 선수들까지 모두 '류현진 효과'를 기대하게 하는 거물 투수로 자리 잡았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 놀라운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덧 대한민국 전체가 응원하고 사랑하는 '국민 투수'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30일 귀국한 류현진은 31일 자정 보신각에서 열리는 '제야의 종' 행사에 참여해 새해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린다. 지난 한 시즌의 눈부신 성과를 대형 계약으로 확실하게 보상 받았고, 결국 2019년 12월의 마지막 날을 성대하게 장식하는 데 성공했다.
토론토 전체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새 팀에 안착한 류현진은 "팀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 이제는 토론토가 내 홈이고, 토론토가 내 팀"이라며 "앞으로는 토론토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젊은 선수들과 함께 뛰는 게 행복할 것 같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