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라코리아(이하 세포라)가 아시아 뷰티의 중심지인 한국에서 서양식 화장법을 내세운 캠페인에 열심이다. 디즈니랜드 애니메이션 ‘뮬란’이나 ‘포카혼타스’의 여주인공처럼 가느다란 눈매를 강조하고, 광대뼈를 부각하는 식이다. 국내 소비자들은 글로벌 화장품 유통망인 세포라의 이런 캠페인이 어색할뿐더러 전형적인 ‘교포 화장법’이 연상된다면서 고개를 젓고 있다. 현지인의 취향과 유행은 고려하지 않고, 서양인의 관점에서 아시아인의 미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K뷰티 업계 일부에서는 “현지화 실패로 일본에서 철수했던 세포라가 한국에서도 소비자의 니즈를 읽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교포 화장법? 세포라의 ‘낯선’ 새해 메이크업 제안
세포라는 지난 2일 신년 캠페인으로 ‘나만의 뷰티 공식’을 공개했다. ‘새해를 새롭게 정의하다(REDefine Your New Your)’를 제목의 이 캠페인은 세포라에서 판매하는 빨간색을 기본으로 눈과 립 메이크업 등을 제안하는 내용으로 꾸려졌다. 지난해 가을 한국에 처음 진출한 세포라가 새해 처음으로 공개하는 화장법 제안이었던 만큼 이목이 쏠렸다.
그런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포털사이트에 공개된 캠페인 밑에는 “어색하다”는 내용의 댓글이 달렸다. 세포라가 보여준 화장이 한국 정서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디가 ‘야호’라는 네티즌은 “서양인이 동양인을 화장시키면 딱 저런 얼굴들이 된다. 우리나라 중학생 같은 화장”이라고 썼다. 다른 댓글들도 “확실히 동양인 화장법과 서양인 화장법은 다르다” “화장법이…. 모델들은 매력적인데” “해외 여행지에서 가볼만큼 간 곳이 세포라인데 한국에 들어온 건 가지 않는다” 등 부정적 내용이 상당수였다.
세포라가 공개한 사진 속 모델들은 눈매를 얇게 빼 올리고, 눈두덩과 광대를 강조하고 있다. 마치 뮬란이나 포카혼타스 여주인공과 비슷했다.
세포라의 새해 화장 제안이 과거 미국의 유명 잡지가 ‘피겨여왕’ 김연아를 표지 모델로 등장시킬 때 보여준 ‘교포식 화장법’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도 있다.
유명 피겨 전문지 '인터내셔널 피겨 스케이팅'은 지난 2007년 김연아를 커버 모델로 내세웠다. 당시 국내 팬들은 김연아의 사진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시원한 눈매와 뽀얀 피부는 사라지고, 과도한 색조로 부은 듯한 눈두덩과 검게 그은 피부색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메인 컷은 ‘김연아가 교포 화장을 한 결과’ 등의 제목으로 국내 온라인 게시판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 여성은 자연스러운 화장을 선호한다.
평소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 이현진(38·회사원) 씨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메이크업 레슨도 받았다”며 “그런데 세포라가 제안한 새해 메이크업 제안은 해외교포 2~3세의 졸업사진에서나 볼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델은 예쁜데 화장이 깎아 먹는 느낌”이라고 꼬집었다.
국내 A 화장품 회사 관계자는 “세포라가 생각하는 ‘동양미인’의 기준이나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한국 여자들은 그런 스타일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런 화장법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현지화 실패로 철수한 세포라재팬…한국은 다를까
세포라는 프랑스의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이 운영하는 편집숍 브랜드다. 전 세계 33개국에 2300여 개 매장을 갖고 있다. 글로벌 화장품 시장을 이끌어가는 거물이다.
하지만 세포라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세포라는 과거 화장품 ‘빅마켓’ 중 하나인 일본과 홍콩에 진출했다가 짐을 싼 기억이 있다. 현지 여성들의 니즈를 충족하지 못한 결과였다. 한국 시장에 진입한 세포라가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김동주 세포라코리아 대표는 지난 10월 국내 1호점을 내기에 앞서 현지화에 가장 신경 썼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일본 세포라는) 현지 팀이 아닌 글로벌 팀이 직접 출점해 현지화에 실패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며 "한국 진출을 앞두고는 특히 현지화에 철저히 대비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세포라 측은 국내 맞춤화를 위해서 한국인의 피부색에 맞는 제품만 골라서 들여왔다고 부연했다. 국내 ‘코덕(코스메틱 덕후, 다양한 화장품을 모으고 비교하는 마니아를 일컫는 관용어)’들은 김 대표의 발언에 큰 기대를 걸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와 사뭇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A사 관계자는 "피부색에 맞는 화장품을 들여오는 건 세포라 말고도 다른 유통 매장이 모두 하는 것"이라며 “세포라가 현지화를 위해 국내 전문가를 많이 기용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글로벌 본사가 캠페인을 전개할 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거나 관여하는 시스템을 가진 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어 "온라인 사용에 익숙한 소비자는 유행에 더 민감하다. 세포라가 현지화의 진짜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최근 봉준호 감독이 ‘지난 20년 동안 한국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 적이 없다’는 질문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은 국제 영화제가 아니라 로컬 시상식 아니냐’고 답해 화제가 됐다”면서 “세포라가 제시하는 교포식 화장법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아직도 자기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우리를 따르라’는 사고는 다양성을 반영하기 어렵다. 대중이 (세포라를) '로컬'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고립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포라는 지난 10일 현대백화점 신촌점 1층에 국내 세 번째 매장을 열었다. 그러나 현지 트렌드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신세계그룹의 ‘시코르’, CJ그룹의 ‘올리브영’을 뛰어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세포라 관계자는 “‘새해를 새롭게 정의하다’ 캠페인은 한국만이 아닌 글로벌에서 함께 진행되는 건이었다”며 “한국과 아시아에 맞게 재해석했는데 레드 컬러에 포인트를 주다 보니 다소 이국적인 느낌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