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에서 스프링캠프를 진행하던 KBO 리그 구단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다. 오키나와에 있던 LG와 삼성은 당초 캠프 기간을 늘리기로 결정했다가 돌아오는 비행기가 운항되지 않을 위기에 놓이자 부랴부랴 짐을 싸야 하는 처지가 됐다. 또 애리조나에 머물던 한화는 당초 예약했던 항공편이 결항돼 귀국일을 하루 앞당겼고, SK와 KT와 NC도 기간 연장을 검토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현지 상황을 고려해 예정대로 캠프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플로리다에서 캠프 일정을 늘려놨던 KIA 또한 항공편을 비롯한 여러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 같으면 귀국 후 각자의 집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뒤 시범경기를 통해 막바지 개막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기다. 그러나 올해는 귀국한 뒤에 더 난관이 많다. 출범 이후 최초로 시범경기가 전면 취소된 데다 팀 간 연습경기도 금지돼 모든 구단이 자체 훈련장에서 청백전으로 실전 감각을 다듬어야 하는 형편이다. 각 구단은 1군 선수단이 훈련할 만한 공간과 합숙할 만한 장소를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SK는 2군 훈련장 인근에 1군 미혼 선수들을 위한 펜션까지 대여했고, 한화는 집에서 출퇴근하는 선수들에게 '퇴근 후 외출 금지'와 같은 강제적 지침까지 내려 선수단 건강 관리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이뿐만 아니다. 늘 '팬 퍼스트'를 마음에 새겨야 하는 프로야구 선수들이지만, 당분간은 팬들과의 사인이나 사진 촬영 같은 대면 접촉이 전면 금지된다. 각 구단이 팬들에게도 간곡하게 요청하고 있는 사안이다. 취재진 또한 이 기간에 더그아웃을 비롯한 선수 활동 공간 출입을 할 수 없고, 인터뷰 때와 야구장 내부 이동 시 꼭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지침에 합의했다. 한 마디로 모두가 '코로나19 철벽 방어'에 뜻을 모으고 있는 시기다.
이같은 현실적 문제 외에도 선수단이 호소하는 또 다른 불안감이 하나 있다. '스타트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 미리 예정됐던 2020 KBO 리그 개막일은 이달 28일. 그러나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야구만 '마이 웨이'를 외칠 수는 없는 일이다. 무관중 경기 역시 프로야구의 특성상 실현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지난 3일 각 구단 단장들이 긴급 실행위원회를 열어 리그 정상 개최 여부를 논의했고, 향후 추이를 지켜보되 개막 2주 전까지는 개막 시점을 확정하기로 했다. 정해졌던 날 개막을 강행하려면 14일까지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잠잠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일단 10일 오전 10시 각 구단 사장들이 모이는 이사회에서 정규리그 개막 시점에 대한 1차 결론을 내릴 예정이지만, 야구 관계자들은 "사회 분위기상 아무래도 개막일이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선수들 대부분은 정규시즌 개막에 최적의 컨디션을 만들 수 있도록 자신만의 훈련 스케줄에 따라 몸을 만든다. 각 팀 주전급 선수들에게는 원하는 날짜에 컨디션을 맞추기 위해 저마다 오랜 기간 쌓아 온 루틴이 있다. 한화 베테랑 타자 김태균은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막바지에 "타격은 '업 앤 다운'이 있기 때문에 캠프가 끝나갈 때쯤에는 오히려 운동량을 늘려서 몸을 힘들게 하고 컨디션을 다운시켜 놓는다"며 "그래서 이 시기에 운동하기가 참 힘들다"고 했다.
따라서 '개막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이들이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할 결승선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캠프지에서 만난 선수들은 "시범경기가 취소된 것보다 시즌 개막일을 알 수 없다는 게 더 불안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시기에 맞춰 몸을 끌어 올리려고 스케줄을 잡고 훈련을 해왔는데, 언제가 될 지 모르니 운동을 어느 정도 해놓아야 할 지 감이 안 잡힌다"는 얘기다.
많은 시즌을 치러보지 않아 아직 노하우가 부족한 선수들은 더 그렇다. 한화 3년차 내야수 정은원은 "원래는 개막일과 시범경기 일정이 딱 정해져 있어서 그 날짜를 생각하고 '이때 시작이다' 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면 의욕이 확 치솟게 된다"며 "그런데 올해는 어느 순간부터 시즌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다 보니, 싱숭생숭해지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 놓았다. 또 "지금은 무엇이 어떻게 될지 확실히 몰라서 '지금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며 "나뿐만 아니라 다들 이런 상황이니 나만 극복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각오를 다졌다.
올해 KBO 리그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SK 마무리 투수 하재훈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해 캠프에서 (시속 150km 중반대 강속구를 뿌릴 정도로) 오버 페이스를 하다 정작 시즌 때는 캠프 때만한 구위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며 "그래서 올해는 일부러 천천히 구속을 올리면서 시즌 때 진짜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개막일이 늦춰지면 이 계획도 어그러진다.
그는 "불펜인 나도 그렇지만 선발 투수들은 더 힘들 것이다. 나야 페이스를 조금 조절하면 되지만, 선발들은 늘 개막일에 맞춰 투구 수와 컨디션을 올릴 수 있게 준비하는데 다들 그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지금 캠프에서 연습경기를 한창 하고 있는데, 개막이 연기되면 또 그 사이에 공을 아예 안 던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러면 또 시즌 때 그만큼 부담이 되지 않을까"라며 "시즌 도중 올림픽에 나갈 투수들도 있을 텐데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우려했다.
여기에 한 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외국인 선수들이 코로나19가 잠잠해질 때까지 입국일을 늦추기로 결정한 것도 걱정될 만한 요소다. 두산과 NC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외국인 선수들은 캠프 종료 후 고국으로 돌아가 개인 훈련을 하다 개막일이 정해지면 한국으로 건너와 팀 훈련에 합류하기로 했다. 수도권 한 구단 관계자는 "선수들 개인의 걱정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 만류하는 부분이 더 크다"며 "원래 가족과 함께 들어오기로 했던 선수들도 가족 없이 혼자 한국에서 지내기로 마음을 바꾸는 추세"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또 "외국에서 캠프를 치르면서 선수들은 뉴스나 지인들의 소식으로만 한국 상황을 접하게 되니 더 (귀국했을 때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다"며 "하루 빨리 개막일이 결정되고 방침이 확정돼야 선수들의 심리적 동요도 조금은 가라앉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