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경찰에 잡힐 무렵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런 ‘전제’를 단 글이 쏟아졌다. 요약하면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맞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들은 그러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도덕성 문제 제기는 물론 성 대결 구도로의 전환, n번방을 야동(야한 동영상)에 빗대며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갔다.
이 같은 주장에 전문가들은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라며 “텔레그램 ‘n번방’ 범죄를 축소ㆍ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
도덕성을 문제 삼아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
첫째는 “피해자가 그럴만한 원인을 제공했다”며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이런 글에는 대부분 “피해자가 ‘일탈계’를 했던 사람”이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일탈계’는 SNS에서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나체 사진이나 자극적인 모습을 촬영한 뒤 업로드하는 계정을 의미한다. 글쓴이들은 “이런 일탈 행위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소위 ‘피해자 부정’이라고 하는데 사회심리학적으로 중화기술 중 하나다”라며 “원래 음란한 사람이다, 혹은 약점이 잡혀서 자발적으로 들어와 행동해놓고 왜 나에게 책임을 묻냐는 방식으로 자기 행위에 대해 합리화를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도 “피해자에 대한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는 건 해서도 안 되고 성립할 수도 없는 2차 가해”라고 못 박았다. 그는 “피해자들이 위협을 받으며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였던 범죄 사건이다. 특히 미성년자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인지적ㆍ신체적 힘을 갖고 있지도 않다”며 “범죄 피해자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
남성 vs 여성, 성대결로 전환
두 번째는 이번 사건을 젠더 이슈, 즉 성 대결로 몰고 가려는 주장이다. 텔레그램 n번방에 접근한 인원이 26만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오자 일부 네티즌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한다’며 “남성들이 뭐 XX. n번방을 내가 봤냐”는 글이 담긴 이미지를 공유했다. 지난 24일에는 뮤지컬 아역 배우로 활동하는 김모씨는 해당 이미지를 SNS에 게시했고 논란이 되자 사과했다.
이에 신 교수는 “현재 여성이 성폭력 범죄의 희생양이 됐기 때문에 이에 대해 비판하는 건데 이걸 남성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며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왜곡해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불법, 가혹한 성폭력 사이트를 옹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공 교수는 “젠더 감수성에 대한 부분을 건전하게 토론하는 건 좋지만, 남혐이나 여혐으로 가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며 “남성 커뮤니티뿐 아니라 여성 커뮤니티도 이번 사건을 성별 대결로 끌고 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
텔레그램 속 성 착취 영상, 야동에 빗대기도
이번 텔레그램에서 유포된 성 착취 영상을 단지 ‘야동’이라고 보는 시각도 문제다. 한 커뮤니티 이용자는 “야동 봤다고 이를 강력 처벌하면 앞으로 포르노를 보면 처벌받는 거냐”고 물었다. 이에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이번 사건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하게 침해한 범죄 행위다. 야동은 물론 음란물이란 표현도 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용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했다. 신 교수 역시 “텔레그램 n번방은 단순히 인간의 성욕 문제가 아니라 폭력이 일어난 범죄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왜곡된 시각을 지적하며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고 상임대표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관점이 남아있다. 성폭력 사건을 여전히 피해자 잘못으로 치부하는 건 익숙한 문법”이라며 “제대로 처벌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 역시 “엄중히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다는 걸 20대 국회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면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처벌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