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영웅.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는 인물을 뜻한다. SK 7년차 투수 이건욱(25)이 그랬다.
이건욱은 SK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동산고 시절 전국구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면서 '초 고교급 투수'로 통했고,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에서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와 맞대결한 적도 있는 특급 유망주였다. 2014년 신인 1차 지명(계약금 2억원)을 받고 SK에 입단하자 팀의 기대도 온통 그에게 쏠렸다.
그러나 데뷔 후 잦은 부상으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한 게 문제였다. 입단 직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토미존 서저리)을 받았고, 2015년 겨울에는 미국 교육리그에서 발가락 골절상을 입어 다시 재활에 오랜 시간을 매진했다. 지난 2년간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 의무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향한 의지만 곱씹어야 했다.
그런 이건욱에게 올 시즌은 새 희망에 부풀 만했다. 입단 후 처음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중도귀국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스케줄을 소화했다. 이건욱은 "이전에는 늘 캠프에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오버페이스를 하곤 했다. 올해는 '꼭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며 "무엇보다 최대한 안 다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캠프 룸메이트였던 선배 문승원의 조언은 그런 그에게 깨달음을 안겼다. 지난 2월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문승원은 "건욱이를 보면 예전의 나처럼 캠프에서 쫓기는 느낌이더라. 훈련도 너무 많이 하려 하는 모습이 보여서 오히려 훈련을 줄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며 "예를 들면 장시간 비행을 하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지쳐 있는 상태이니 다음날 최대한 쉬는 게 좋다. 하지만 건욱이는 의욕이 넘쳐서 다음날 바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려고 하기에 내가 말렸다"고 했다.
휴식일에 방에서 시간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문승원은 "쉬는 날인데 방에서 자꾸 뭘(운동을) 더 하려고 하는 게 건욱이다. 그래서 불 끄게 하고 최대한 일찍 자게 했다"며 "늘 조기 귀국하던 건욱이가 끝까지 캠프를 할 수 있게 된 건 나랑 방을 쓴 덕분인 것 같다. 그 부분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짐짓 농담했다.
실제로 지금 이건욱은 아픈 데가 없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지긋지긋한 고생을 해왔던 탓에 그 사실만으로도 자신감이 붙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마침내 마운드에서도 빛났다. 그는 지난달 28일 잠실 두산전에 외국인 투수 닉 킹엄의 대체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 5⅓이닝 3피안타 1실점 호투를 펼쳤다. 5회 2사까지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았을 정도로 위력적인 피칭이었다. 10연패를 간신히 끊은 뒤에도 다시 연패가 이어져 고생하던 SK는 이건욱의 호투와 함께 반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기대를 뛰어넘고도 남을 역투였다.
무엇보다 데뷔 첫 선발 등판에서 입단 7년 만에 감격적인 프로 첫 승리를 따냈다. 동료들은 승리구를 챙겨 날짜와 장소, 의미를 적어넣은 뒤 선물로 건넸고, 염경엽 SK 감독은 "첫 선발 등판에서 얻어낸 데뷔 첫 승을 축하한다. 이 승리로 건욱이가 자신감을 더 갖게 됐으면 좋겠다"고 덕담했다.
이건욱 스스로에게도 감격적인 순간이다. 그는 "아웃 카운트 하나하나에만 집중하면서 공을 던졌더니, 끝나고 나서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며 "프로 첫 승리를 하는 순간을 오랫동안 꿈꿨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힘들고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고 웃어 보였다.
고난의 세월이었다. 이겨내야 하는 이건욱과 기다려야 하는 SK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이건욱은 "그동안 뭘 좀 해보려고만 하면 다치고 아파서 많이 힘들었다. 입단 7년 차인데 실제로 야구를 한 건 2년 밖에 안 되는 것 같다"며 "다른 팀이었다면 이미 포기한 선수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나를 믿고 기다려 준 SK 팀에 감사한다. 이제 구단에 밥값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물론 앞으로 갈길이 멀다. 킹엄이 복귀하게 되면 이건욱에게 다음 선발 기회가 또 언제 올 지 모르는 일이다. 다음 등판에서 또 이처럼 좋은 피칭을 할 수 있을지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래도 이건욱은 그저 '아픈 데 없는' 몸 상태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그 과정에서 팀의 반등에 힘을 보탤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는 "한 경기 이겼다고 또 무리하다 보면 다시 다칠 수 있으니 늘 하던 대로 하겠다"며 "안 다쳐야 계속 경기에 나설 수 있다. 무조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마운드에 서고 싶다"고 했다. '부상 없는 야구인생'은 모든 프로 선수의 희망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이건욱이기에 더 큰 간절함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