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입단 첫 시즌인 2008년 총 14차례 선발 등판해 1승 12패 평균자책점 7.24로 부진했다. 이후 11년간 288경기는 모두 구원 투수로 나왔다. 중간 계투로 10홀드를 올린 적도 있고, 2018년에는 27세이브를 거뒀다. 12년 만에 다시 선발로 돌아와 2승 1패 평균자책점 3.52의 놀라운 반전과 안정감을 선보이는 LG 정찬헌(30)의 이야기다.
정찬헌은 올 시즌 등판 때마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5월 7일 두산전에서 무려 4255일 만에 선발 등판했다. 다음 등판이던 16일 키움전에서는 6이닝 3실점으로 4264일 만에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 이하)를 기록했다. 27일 한화전에서는 마찬가지로 6이닝 3실점을 기록, 2008년 5월 20일 삼성전 이후 12년 하고도 열흘이 더 흘러 4390일 만의 감격스러운 선발승을 챙겼다. 지난 4일 삼성전에서는 7이닝 무실점으로 선발 2연승을 달렸다. 12년 전에는 한 시즌 동안 14차례의 선발 등판에서 고작 1승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올 시즌 한 달 동안 선발 2승을 챙긴 것이다. 특히 이날 등판에선 개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6개를 훌쩍 넘겨 11개를 기록했다.
그는 "많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불펜에서 뛰다 수술로 인해 선발로 돌아왔는데, 승리를 챙겨 정말 기분 좋다. 지금까지 활약에 만족한다"고 웃었다.
그에게는 입단 첫 시즌의 추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2008년 당시 2차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입단했을 만큼 촉망받은 유망주였다. 150㎞ 묵직한 빠른 공이 주무기였다. 3월 29일 SK와의 개막전에 4이닝 무실점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고, 개막 후 4월까지 평균자책점 2.04로 맹활약해 5월부터 선발로 나섰지만 성적은 영 신통치 않았다. 이후 선발 11연패에 빠졌다. 그에게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선발 등판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중간과 마무리로만 활약하며 2009~2019년까지 24승 25패 26홀드 46세이브 평균자책점 5.14를 기록했다. 2018년 마무리 투수로 27세이브를 올려 전성기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이듬해 허리 디스크 수술로 고우석에게 마무리 보직 바통을 넘겨줘야 했다.
이번 시즌 출발도 더뎠다. 지난해 허리 수술 여파로 호주 시드니 캠프 후 일본 오키나와 캠프로 넘어가지 않고, LG 2군 훈련장인 이천에서 몸을 만들었다. '중간 계투로 다시 뛸 수 있을까'라며 걱정하던 때에 코칭스태프와 협의 속에 시간이 다소 필요한 선발 투수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결정 났다. 마침 LG는 4~5선발 찾기 고민거리를 안고 있던 때였다. 정찬헌은 "다시 선발 투수로 돌아오게 될 줄 전혀 몰랐다"며 "(구원 투수로) 연투보다 한 경기에 모든 걸 쏟아붓자고 다짐했다"고 떠올렸다.
정찬헌은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코칭스태프의 배려 속에 마운드에 오른다. 한 차례 등판 후 엔트리 제외 혹은 보통 선발 투수보다 긴 휴식 시간을 보장받는다. 그는 "코칭스태프에서 배려를 해주는 건 등판 때 더 잘 던지라는 의미다. 많이 신경 써주셔서 더 책임감을 느끼고 마운드에 오른다"고 말했다.
성적으로 보답하고 있다. 타일러 윌슨-케이시 켈리-차우찬으로 이어지는 믿었던 1~3선발이 지난해보다 주춤하는 사이, 가장 고민거리였던 5선발의 정찬헌·이민호 등 전혀 계산하지 않는 선발 투수가 호투하고 있다. LG가 초반 순항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류중일 LG 감독은 "정찬헌의 회복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지난 5일 등판 후 몸 관리 차원에서 정찬헌을 엔트리에서 뺐지만) 다음부터는 솔직히 (로테이션을 소화하게 둘지) 모르겠다"며 행복한 고민을 드러냈다.
정찬헌은 "(이)민호에게 둘이 합쳐 10승만 하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 일화를 소개한 뒤 "이제 욕심이 없다"고 했다. 이어 "(2020년 1차 지명 투수) 이민호는 앞으로 15~20년 팀을 이끌 선수다. 나도 겁 없이 던질 때가 있었는데"라고 회상한 그는 "같은 부위에 수술을 두 번이나 해 운동법 등을 많이 바꿨다. 구속이 예전처럼 안 나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연구하고 있다. 힘으로 하던 시절보다 조금 더 노련하게 던지려 한다"고 달라진 자세를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