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허투루 지켜낸 자리가 아니다. 이미 대단한 김혜수를 바라보는 입장에선 당연한 흐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냥 얻어낸 당연함은 결코 없다. 분명한 노력이 뒷받침 된 결과.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면서 본연의 영향력을 긍정의 방향으로 이끄는 김혜수의 미래지향적 태도가 마주할 때마다 감동을 동반하는 이유다.
영화 '내가 죽던 날(박지완 감독)'로 2년만에 스크린에 컴백하는 김혜수는 단순히 김혜수가 주연이라서가 아닌, 감독부터 주요 캐릭터들까지 대부분 '여성'으로 꾸려진 작품의 중심에서 남다른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극중 사라진 소녀를 추적하는 형사 현수로 분한 김혜수는 드라마 '시그널'의 형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뽐낼 예정. "내·외적으로 피폐한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김혜수의 설명이 캐릭터 소개를 뒷받침한다.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영화다. 최근 진행된 '내가 죽던 날' 제작보고회에서는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중 가장 이목을 집중시킨 순간은 '여성 영화'라 표현되는 '내가 죽던 날'에 대한 김혜수와 이정은의 소회였다.
여성 영화인들이 의기투합한 여성영화라는 설명에 특별한 오기(誤記)는 없다. 실제로 '여성영화 전성기'라 표현될 정도로 최근 국내 영화계는 눈에 띄는 여성 감독이 대거 등장했고, 여배우 원톱 혹은 여성 배우들이 주축이 된 작품도 그 수가 월등히 많아졌다. 숱한 남성영화의 틈새를 한창 노릴 땐 '여성영화'라는 것 자체라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되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여전히 아쉬운건 사실이지만 몇 년 새 비약적인 성과와 성장을 일궈낸 여성영화의 현주소는 분명 고무적이다.
김혜수 역시 이 같은 상황에 반가움을 표했다. 하지만 오랜시간 충무로 내 여배우로 제 이름을 아로새긴 김혜수는 한 발, 아니 두 발 더 나아간 희망을 그려냈고, 이는 김혜수가 생각하는 현재라는 것이 새삼 의미있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매 순간 눈 앞에 보이는 현재에 만족했다면 지금의 변화는 없었을 터. 여전히 제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그리고 언젠가는 보란듯이 현실이 될 더 큰 미래를 염두하는 김혜수의 바람은 박수를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내가 죽던 날'을 '여성영화'라는 이유로, 그것에 초점을 맞춰 선택하지 않았다"고 단언한 김혜수는 '내가 죽던 날' 작품 본연이 품고 있는 가치를 역설하며 "이야기의 중심 축이자 핵심을 이끄는 역할이 여성인 것은 맞지만 지만 굳이 성별을 따져가면서 보지는 않는다. 끌리는 이야기였고, 우리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커다란 메시지 중 하나가 '연결점이 없는 사람들간의 모종의 연대감. 거기에서 오는 위로와 용기'인데 촬영하며 크게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혜수는 "이야기 안에서 외적으로 어필됐던 여성 캐릭터들이 갇혀진 내면, 다듬어진 캐릭터로 소개되는 작품이 많아지고 있고,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참여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며 "많은 여성 감독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단단하게 내실을 기하고 제대로 준비해서 '여성 감독으로서' 소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준비된 '영화인'으로 말할 수 있는 계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 충무로 관계자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없고의 기준은 없지만 '누구의 입'을 통해 전달 되느냐는 확실히 다른 문제다. '영향력'이라는 단어가 괜히 쓰이는 것은 아니다. 김혜수의 발언을 보며 '역시 그 이상을 내다보는구나' 싶었고, 책임감도 느껴졌다. 30여 년간 숱한 풍파를 이겨내고 버텨내며 노력했을 김혜수의 세월을 감히 쉽게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 리스펙 하게 된다. 존재 자체만으로 상징적인 배우의 힘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