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펍(pub), 미트 파이(meat pie) 등은 영국축구 문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하나 더. 훌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공 하나를 두고 22명의 선수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축구가 우리 곁에 있는 이상, 훌리건이즘(hooliganism)은 잉글랜드의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리버풀 훌리건들은 유럽클럽대항전에 참가한 리버풀을 쫓아 대륙으로 넘어갔다. 훌리건들은 처음 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화려한 패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로컬 상점을 약탈했고, 전리품인 고급 스포츠웨어와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걸치고 귀국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이 돌아올 때 영국 경찰은 닥터마틴 스타일 부츠를 신은 스킨헤드 훌리건에 집중하다가, 값비싼 옷을 입은 리버풀 훌리건들을 놓쳤다는 것이다. 이후 대륙의 새로운 패션이 영국 전역에 퍼졌다. 그 결과 라코스테, 엘레세, 휠라 등의 브랜드가 인기를 얻었다.
당시 클럽대항전인 유로피언컵 등에는 국가당 하나의 축구클럽만 참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훌리건들의 쇼핑 기회도 제한됐다. 대신 그들은 비슷한 스타일의 영국 브랜드를 이용했다. 덕분에 인기를 얻은 브랜드가 프레드 페리, 라일 앤 스코트 등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훌리건을 캐주얼(Casuals)이라고 부르게 됐다. 현재까지 캐주얼이란 단어는 훌리건 집단을 대표해 사용되고 있다.
1978년 개봉된 영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은 노란색 운동복을 입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사람들은 체육관 밖에서도 지퍼 달린 상의와 바지로 구성된 운동복을 즐겨 입게 된다. 트랙수트(tracksuit)라고 부르는 이 스타일도 캐주얼 훌리건들의 사랑받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 등장한 캐주얼 훌리건들의 옷차림에는 여러 가지 전략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훌리건들은 테니스 스타 같은 세련된 옷을 입기도 했다. '저런 옷을 입고 난투극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경찰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옷을 입은 훌리건들은 펍에 출입하기 쉬웠고, 라이벌 그룹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훌리건들은 라이벌 그룹과 그들의 본거지 펍을 풍비박산으로 만들 때도 '멋지게' 보이기를 원했다. 방송인이자 퀸즈파크 레인저스(QPR)의 열렬한 팬이었던 로버트 엘스는 그의 저서 『The Way We Wore : 우리가 입은 방식』에 이렇게 썼다.
“1980년대 우리는 코벤트리로 원정을 갔었다. 코벤트리 시티의 훌리건들은 휠라 옷을 입었으나 사실 당시 런던에서 휠라의 인기는 한물간 상태였다. 우리는 한바탕 하기 전에 그들의 패션을 조롱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스타일 대결에서 진 것을 깨달았고, 전의를 상실했다.”
짓궂은 영국 날씨 때문에 1990년대 캐주얼 훌리건의 옷차림도 변했다. 휠라, 라코스테 같은 레저 웨어는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는 옷이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영국 축구장에서는 실용적인 옷이 필요했다. 그래서 편하면서도 세련되고, 견고한 스타일이 인기를 얻었다. 버버리, 아쿠아스텀, 프라다, 아르마니, 랄프 로렌, CP컴퍼니 같은 브랜드가 훌리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은 배경이다.
훌리건들은 노동자 계급이다. 그렇다고 싸구려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랄프로렌 옷을 사느라 주급을 다 쓰는 한이 있어도,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입었다. 상류층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일반 서포터스와 차별화되고 싶어 했다. 당시 영국의 거의 모든 펍에서는 캐주얼 훌리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캐주얼 메이커 중 이탈리아 브랜드인 스톤 아일랜드(Stone Island)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1992년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92 기간 스톡홀름 상점에서 스톤 아일랜드를 발견하고 약탈했다. 잉글랜드가 유로 대회에서 탈락하자 이들은 이 옷을 입고 대규모 난동을 부렸다. 옷 왼팔에 부착된 컴퍼스 로고로 유명한 스톤 아일랜드는 이후 캐주얼 훌리건의 대표 유니폼으로 자리잡았다.
컴퍼스 패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켈트 십자가와 매우 유사한 형태다. 때문에 영국 경찰은 스톤 아일랜드 로고와 켈트 십자가의 연관성을 조사하기도 했다. 훌리건과의 깊은 관계 덕분에 이 브랜드를 입은 사람들은 펍 출입을 거부당하는 등의 곤란을 겪었다. 90년대 후반에는 경찰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훌리건이 스톤 아일랜드 옷에서 컴퍼스 로고를 떼어냈다.
이탈리아 브랜드가 훌리건들의 대표 유니폼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많은 이들은 컴퍼스 패치에서 답을 찾고 있다. 이 로고는 훌리건들의 축구 열정과 싸움을 마다치 않는 용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훌리건들은 경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특정 브랜드에서 탈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스톤 아일랜드, CP컴퍼니, 라코스테 등과 같은 훌리건의 대표 브랜드는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버버리와 프라다는 훌리건들 탓에 브랜드 가치가 하락하는 걸 심각하게 고민했다. 특히 버버리는 훌리건과 차브(Chav·비행청소년 집단)가 자사의 옷을 입은 채 공공장소에서 마약을 하고, 난동을 부리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버버리는 특유의 체크무늬를 가리고, 이를 제품 안감으로 사용하는 디자인 혁신을 단행했다.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영국 훌리건의 행동에 '영국병(The English Disease)'이라는 말도 생겼다. 그러는 동안 훌리건들은 독특한 패션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독자들의 옷장에도 이 칼럼에서 언급한 브랜드 옷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으로 인해 지치고 힘든 요즘, 훌리건 스타일로 잠깐의 일탈을 해보는 건 어떨까. 모즈(Mods)나 캐주얼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 훌리건 옷을 입고 TV에서 축구 경기를 보자. 시원한 맥주와 함께 한국식 치킨도 곁들이자. 잠깐이지만,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