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이 하나만 있으면 무너지는 법이잖아요. 저(이승현)랑 (이)종현이가 오리온을 양쪽에서 지탱하는 두 기둥이 돼야죠."
고양 오리온의 '수호신' 이승현(28)은 얼마 전 든든한 '보좌관'을 얻었다. 대학 시절 후배이자 친동생과 다름없는, 가장 아끼는 후배 이종현(26)과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리그 재개를 앞둔 지난달 26일 고양체육관에서 일간스포츠와 만난 이승현은 "프로에서 종현이와 한 팀에서 뛸 가능성은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우리가 '선수 생활 말년에 서로 1억원씩 걷어 같은 팀에서 뛰자'는 얘기까지 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그저 좋다"며 씩 웃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 시절 이종현이 이승현에게 "친해지고 싶어서 연락드렸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대표팀을 거쳐 고려대에서 꽃을 피웠다. 이승현과 이종현이 손발을 맞춘 고려대는 대학 무대를 평정했다.
두 선수는 각각 2014년과 2016년 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오리온과 울산 현대모비스에 지명됐다. 이승현의 말처럼, 프로에서 소속팀이 갈린 두 선수가 다시 만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달 오리온이 현대모비스, 전주 KCC와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이종현을 영입하면서 '안암골 호랑이'들이 고양에서 재회했다.
이승현은 "기사가 나왔을 때만 해도 (확정된 게 아니니까)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경기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트레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얘기해주셔서 그때 알았다"며 "종현이가 어떤 선수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 팀에 와서 꽃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종현은 "강을준 감독님이 하신 말처럼 정말 '전생에 우린 부부가 아니었나' 싶다. 프로에서는 절대 한 팀에서 못 만날 거라고 했다. 이렇게 트레이드가 될지 몰랐다"며 웃었다.
이승현과 이종현의 '한솥밥 효과'는 대단했다. 프로 데뷔 후 줄곧 부상에 신음하던 이종현은 오리온 이적 후 2경기에서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오리온은 기세를 몰아 2연승을 달리고 휴식기를 맞았다. 부상으로 인해 프로 무대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이종현의 활약은 오리온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 올렸다.
이종현은 "오리온에 와서 처음엔 긴장 됐지만, 강을준 감독님이 자신감을 많이 심어주셨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잘할 수 있는 걸 하던 대로 하라'고 말씀해주셔서 첫 경기부터 수월하게 치른 것 같다"고 미소를 보였다. 강을준 감독은 "이종현이 리바운드해주고, 블록 한두 개씩 해주고…. 그 정도만 해도 좋다. 올 시즌은 70%만 해줘도 '생큐'다. 65% 정도만 나와도 좋을 것"이라는 말로 그의 부담을 덜어줬다.
휴식기 이후 가장 주목받는 건 이종현의 가세로 완성된 오리온의 '트리플 포스트'다. 이미 서울 삼성전, 인천 전자랜드전에서 선보인 바 있다. 이승현(197㎝)과 이종현(203㎝)에 외국인 선수 제프 위디(211㎝) 또는 디드릭 로슨(202㎝) 중 하나를 동시에 기용한 것이다. 세 명의 빅맨을 코트에 풀어놓으면, 과거 원주 동부(현 DB)의 '동부산성' 못지않다는 평가다. 여기에 가드 이대성(190㎝)과 슈터 허일영(195㎝)까지 가세하면 전원 190㎝ 이상의 '빅 라인업'이 꾸려진다. 어느 팀이라도 막기 어려운 높이의 '오리온 산성'이 구축되는 셈이다.
'오리온 산성'이라는 말에 강을준 감독은 반 농담처럼 "우리는 '카피(copy)'를 싫어한다. 오리온 산성 말고 용암수처럼 치솟는 높이라고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승현도 "우리는 세 명 모두 빅맨이 뛰기 때문에 스타일이 '동부산성'과 많이 다르다"고 고개를 저었다.
오리온의 트리플 포스트가 제 위력을 발휘한다면 우승 후보로 떠오를 수 있다. 그래서 강을준 감독은 2주 남짓한 휴식기 동안 이들의 이들에게 더 세밀한 움직임을 요구했다. 이승현은 "위디, 로슨과 호흡을 맞춰서 계속 연습했다. 감독님이 원하시는 대로 트리플 포스트일 때 리바운드를 무조건 가져오려고 한다"며 "이게 잘 통한다면 골밑 승부에서는 9개 구단 어느 팀에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종현이 합류하면서 이승현의 어깨가 가벼워진 건 틀림없다. 이종현이 오기 전까지 이승현은 팀내 출전시간 1위를 기록 중이었다. 강을준 감독이 붙여준 '수호신'이라는 별명에는 팀을 위해 헌신하는 이승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담겨있다. 스스로 '보좌관'을 자처한 이종현이 반가운 이유다.
이승현은 "(종현이가 왔으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당연히 그동안 힘들었다"며 웃고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다. 이제 종현이가 뒤에서 받쳐주니까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종현도 "승현이 형 대신 뛰든, 같이 뛰든 몇 분을 뛰더라도 믿음을 줄 수 있는 플레이를 하겠다. 승현이 형의 존재감이 워낙 크니까 내가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날 믿고 편하게 뛸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휴식기 동안 전력을 가다듬은 오리온은 6강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고양의 수호신' 이승현과 '수호신의 보좌관' 이종현의 활약이 필수불가결하다. 둘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이승현은 "나와 종현이는 늘 관심과 기대를 받아왔고, 그만큼 책임감과 부담감도 크다. 혼자였다면 아주 힘들었겠지만 둘이라서 서로 부담과 책임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게 행운이고, 축복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승현은 "언제나처럼 내 일을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인 건 '역시 이종현이다, 이종현이 죽지 않았다' 소리를 듣는 것"이라며 동생에 대한 애정을 전했다. 이승현은 또 "기둥이 하나면 무너질 수도 있다. 양쪽으로 기둥이 버티고 있어야 무너지지 않는 법"이라며 "종현이가 이번 시즌을 잘 보내고, '보좌관'이 아닌 기둥이 되어주면 우리 팀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