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FA(자유계약선수) 시장은 변수가 꽤 많았다. KBO리그 구단 모기업의 대부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다. 야구계 안팎에선 "이번 FA 시장에선 찬바람이 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정작 시장 문이 열리자 선수들의 몸값은 불황을 타지 않았다. 공급보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과열됐다.
불쏘시개 역할을 한 건 허경민(30)의 계약이다. FA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A 구단 단장은 "허경민 계약 후 FA 협상 분위기가 바뀌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난 10일 원소속구단 두산에 잔류한 허경민은 계약 기간 4년, 총액 65억원(계약금 25억원, 연봉 40억원)에 사인했다. 4년 계약 뒤 3년 20억원의 선수 옵션까지 포함해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FA 7년 계약(최대 85억원)을 따냈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3년 옵션'으로 인해 계약 규모가 더 커 보이는 효과까지 일어났다.
올 시즌 FA 최대어로 평가받던 허경민의 계약은 FA 시장에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허경민이 일종의 '시장가'를 형성해 다른 계약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허경민 계약 하루 뒤 SK행이 발표된 최주환(32)은 4년 총액 42억원(계약금 12억원, 연봉 26억원, 옵션 4억원)에 계약을 완료했다. 관심이 쏠린 총액 40억원을 무난하게 넘겼다. SK가 빠르게 움직여 계약하지 못했다면 몸값이 더 올라갈 여지가 충분했다.
허경민의 계약이 직격탄을 날린 건 오재일(34) 계약이다. 이른바 FA '빅3'로 분류된 허경민과 최주환의 계약이 완료되자 오재일에 대한 수요가 몰렸다. 허경민과 최주환을 영입하지 못한 팀들끼리 경쟁이 붙었다. 허경민과 오재일 계약을 동시에 대리한 리코스포츠에이전시 입장에선 최상의 시장 조건을 만들어 낸 셈이다. 선수 한 명을 두고 복수의 팀이 영입을 원하니 계약 조건은 계속 올라갔다. 시간은 선수 편이었다.
오재일은 허경민보다 나이가 많지만, 시즌 2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거포다. 수준급 1루수라는 포지션 프리미엄도 있다. FA 시장이 열리기 전에는 최대 30억 원 정도의 계약이 유력해 보였다. B 구단 단장은 "오재일은 나이 때문에 처음에 4년 계약안을 받기 힘들다고 봤다. 하지만 허경민 계약 후 몸값이 확 뛰었다. (총액의) 앞자리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FA 시장에는 이른바 '판짜기'가 중요하다. 2017년 11월 롯데가 FA 포수 강민호를 삼성에 뺏긴 뒤 전력보강을 위해 외부 FA 외야수 민병헌을 4년 총액 80억원에 영입했다. 당시 야구계에선 "롯데가 오버페이했다"는 얘기가 꽤 많았다. 강민호와 민병헌을 고객으로 둔 대리인이 강민호의 이적을 성사시키면서 민병헌의 몸값을 올리는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냈다. 주축 선수를 뺏긴 구단의 약점을 계약에 이용했다.
이번 겨울 분위기도 비슷하다. 허경민 계약이 만들어낸 나비효과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구단에선 곡소리가 나지만, 선수와 대리인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손에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