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이청용(33·울산 현대)은 행복했다. 2021년 이청용은 더 행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건 '내려놓기'다.
지난해 프로축구에서 가장 뜨거웠던 소식 중 하나가 이청용의 컴백이었다. 그는 2009년 FC 서울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한 뒤 크리스털 팰리스(잉글랜드), 보훔(독일) 등 유럽 클럽에서 11년 동안 활약한 뒤 K리그1(1부리그) 울산 유니폼을 입었다.
유럽에서 성공한 선수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내려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30대에 접어든 이청용은 투쟁적인 삶보다 즐길 수 있는 삶을 택했다. 물론 최선을 다해 뛰는 '전투력'은 그대로다. 우승과 영광을 바라는 열정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축구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의 경기력에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변함없는 클래스를 과시하면서도 전성기보다 더 노련해졌다. 여유로웠으며, 결정적인 순간 해결하는 능력을 뽐내 '축구 도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말 2020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귀국해 자가격리 중인 이청용과 전화인터뷰를 했다. 그의 행복이 올라가는 게 전해졌다.
-2020년을 돌아보면 어떤가. "1년이 금방 지나간 거 같다. 즐거웠던 일이 많았다. 즐겁게 경기를 했고, 많이 이겼고, 마지막에는 ACL에서 우승했다. 정말 기쁜 한 해였다. 다른 시즌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물론 준우승을 2번(K리그1 FA컵) 한 건 정말 아쉽다. 하지만 울산이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던 팀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한 걸 알고 있기에 준우승을 했어도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2006년 리그컵 이후 두 번째 우승의 느낌은. "이번 ACL 우승이 더 기쁘다. 2006년에는 어릴 때라 경기에 자주 나가지 못했다. 이번 우승은 한 경기 빼고 다 뛰었다. 참여도가 더 높았다. '우승할 수 있는 팀에 왔구나'라는 걸 실감했다."
-11년 만에 돌아온 K리그는 얼마나 달라졌나. "리그를 주도하는 팀들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서울과 수원이 리그를 이끌었다. 지금은 전북과 울산이다. 어린 나이에 해외에 많이 진출하는 것도 바뀐 것 같다. 예전보다 각 클럽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 뚜렷해졌다. 구단을 운영하는 방식도, 전술적인 부분도 11년 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K리그에서 눈에 띄는 후배는. "K리그의 모든 선수를 잘 알지는 못한다. 잘 아는 선수들도 있고, 잘 모르는 선수도 있다. 잘 알고, 친분 있는 선수에 관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잘 몰랐던 선수 중 눈에 띄는 후배가 있었다. 처음 상대해봤는데 좋은 선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상우(포항 스틸러스)다."
-오는 2월 클럽월드컵에 참가한다. "기대가 많이 된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상대들과 겨룬다. 클럽월드컵에서 꼭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선수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됐으면 좋겠다. 클럽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준비한 축구를 클럽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잘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을 만나면 너무 좋겠다. 결과? 모른다. 축구는 해봐야 안다.(웃음)"
-2021년 도쿄 올림픽에 나설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먼저 올림픽을 열 상황이 됐으면 좋겠다. (이)동경, (원)두재 등 울산에도 올림픽대표팀 선수들이 있어 나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연령대 대표팀의 마지막 대회가 올림픽이다. 이후에는 바로 국가대표다. 후회 없이 준비했으면 좋겠다. 런던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듯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동경이와 두재도 잘해서 한국 축구에 많은 기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
-올림픽, 아시안컵, 월드컵, 유럽까지 모두 경험했다. 많은 후배의 롤모델이다. 어떻게 하면 이청용처럼 될 수 있나. "글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먼 미래를 보고 달려가는 것보다 지금 상황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다음 경기 준비만 잘한다면 좋은 기회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꿈을 크게 가지는 것도 좋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2022 카타르월드컵 예선이 다시 시작된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생각은. "소속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자연스럽게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전에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대표팀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라에서 불러준다면 나는 언제든지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자신이 있다. A매치 89경기에 나섰는데, 사실 기록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에 꼭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대표팀이 불러줄 때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뿐이다."
-2022 카타르월드컵이 마지막 월드컵이 될까. "난 월드컵을 경험했기에 지금 큰 욕심은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나는 국가가 필요로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월드컵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내 나이 때는 일 년 일 년이 다르게 때문에(웃음), 내년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다. 솔직히 나보다는, 내 포지션에 워낙 좋은 후배들이 많아서 후배들에 거는 기대가 더 크다."
-20대 이청용과 30대 이청용은 어떻게 다른가. "20대 이청용은 더 큰 목표를 가지고 더 높은 리그, 더 높은 클럽에 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30대가 되면서 달라졌다. 2020년 했던 것처럼 정말 즐겁게 경기하면서 팀에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아직 버겁다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없다. 20대 축구보다 30대 축구가 더 재미있다. 더 즐겁다. 20대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다가 한국으로 오니 소통도 더 잘된다. 모든 게 즐겁다."
-1년이 지난 지금, 한국 복귀를 후회한 적 없나. "후회할 거였으면 돌아오지 않았다. K리그를 모르는 상태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후회는 없다. 2020시즌 너무나 즐거웠다. 정말 즐겁게 축구를 했고, 정말 많이 이겼다. 울산의 좋은 선수들과 매일 훈련을 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다.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이 30대가 돼서, 아주 늦지 않은 나이에 K리그로 돌아와서 한국 팬들 앞에서 좋은 모습으로 경기했으면 좋겠다. 내가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
-2021년 각오와 목표는. "큰 욕심은 없다. 지난해처럼 그라운드에서 많이 뛸 수 있으면 좋겠다. 더 건강하게 다음 시즌을 준비하겠다. 팀이 목표로 하는 K리그1 우승이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울산이 새로운 팀이 될 것 같은데, 안정적으로 팀이 변화하는 과정에 힘을 보태고 싶다."
-한국 축구 팬들에게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시면 좋겠다. 2020년은 정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새해에는 코로나19가 종식돼서 경기장에서 팬들을 자주 봤으면 좋겠다. 울산 경기장도 많이 찾아주기를 바란다. 좋은 축구를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