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KBO) 공인대리인 제도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총체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KBO리그는 2018년 2월 공인대리인 제도를 시행했다. 선수 인권과 권익 보호를 위해 첫발을 내디딘 지 4년째. 그러나 프로야구 안팎에선 "제도가 원래 취지를 잃어버렸다"는 쓴소리가 들리고 있다. 공인대리인 A 씨는 "제도를 만든 게 한국프로야구선수협(선수협)이다. 선수협이 책임 의식을 갖고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자격증 장사'를 한다는 느낌까지 받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인대리인 제도 관리 주체는 KBO가 아닌 선수협이다. 선수협에서 공인대리인 자격시험(지금까지 4회 진행)을 주관한다. KBO는 선수협에 선수 대리인 계약이 신고되면 내용을 전달받아 구단에 알려주는 역할만 한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업무부터 문제투성이다. 대리인이 어떤 선수와 계약하고 등록하는지 선수협은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다.
지난 4일 KBO는 각 구단에 '2020 KBO리그 선수 대리인별 계약 현황' 자료를 보냈다. 2020년 12월 22일 기준으로 작성된 이 파일에는 법인과 개인 등 총 43개의 대리인이 계약한 선수 명단이 정리돼 있었다. 문제는 정보의 오류. 구단이 받은 자료엔 등록이 누락된 선수가 있었다. 선수와 대리인 계약을 한 공인대리인 B가 선수협에 관련 내용을 신고했지만,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C 구단 단장은 "대리인 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본다. 문제는 투명성이다.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다. 얼마나 바뀔지 미지수다. 회의적"이라고 했다.
공인대리인 자격을 반납한 D 씨는 "선수협의 문제가 크다. 감시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정리가 안 되니까 중구난방이다. 규약을 지키지 않더라도 이를 통제할 장치가 없다"고 한탄했다. D 씨는 제1회 공인대리인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 내 선수 대리인 계약을 하지 못했다. KBO리그 선수대리인 규정 제24조 [선수대리인 공인의 취소]에는 '공인을 받은 지 2년 이내 선수와 대리인 계약을 하지 못하면 자격이 취소된다'고 명시돼 있다.
D 씨는 "첫 시험을 볼 때 자격 심사 비용으로 11만원 정도를 냈다. 시험 보는데 44만원, 자격을 취득한 뒤 55만원을 더 냈다"며 "2년 동안 선수 계약이 없어 자격을 잃었지만, 이와 관련해 선수협의 문자나 메일 한 통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선수협의 대리인 관리 감독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격이 취소된 D 씨가 선수와 계약해도 선수협이 걸러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일간스포츠는 지난해 12월 31일 '미등록 상태서 우규민 대리한 리코스포츠에이전시'라는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리코스포츠에이전시는 보도 하루 전 홍준학 삼성 단장과 우규민 계약을 최종 협상할 때까지 선수협에 우규민의 대리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 명백한 'KBO리그 선수대리인 규정' 위반이다. 관련 잘못을 시인한 이예랑 대표는 선수협에 "12월 27일 우규민과 대리인 계약을 마친 뒤 실수로 서류 제출을 누락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홍준학 단장과 이예랑 대표는 FA 시장이 열린 직후인 11월 30일부터 우규민의 계약을 논의했다. 야구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12월 27일 계약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보도 3주가 지나도록 선수협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지난 7일 열린 중재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리코스포츠에이전시에 추가 소명을 요청했지만, 일주일 이상을 기다렸다. 공인대리인 E 씨는 "선수와 계약한 뒤 선수협에 알려야 하는 3일이라는 기한을 지키기 위해 밤늦게 자료를 스캔해 선수협에 보내기도 했다. (우규민은) 가장 중요한 FA(자유계약선수)인데 (등록을) 까먹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A 씨는 "솔직히 이건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기"라며 "이걸 단순 해프닝으로 넘긴다면 자신의 수준을 자인하는 꼴이 되는 거다. 오래 걸릴 사안도 아니다. (선수협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등록 대리인 사건을 처벌할 규정도 기구도 마땅치 않다. 선수협 중재위원회는 선수와 대리인의 분쟁을 중재하는 곳이다. 김용기 선수협 사무총장 대행은 "규약이 미비한 건 사실"이라며 "중재위원회가 다시 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했다. B 구단 단장은 "선수협이 그만큼 제대로 된 기능을 못 하는 거다. 강하게 제재하면 아마 다 등록할 거다. 제재가 없으니까 아무 의식 없이 행동하는 것 아닌가. 시쳇말로 '솜방망이 처벌'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F 구단 단장은 "잘못이다.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미등록 대리인 사건은) 작은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고 했다. G 구단 단장은 "문제가 많다"고 촌평했다.
KBO 공인대리인 제도에는 독소조항이 있다. 2017년 9월 열린 KBO 제3차 이사회에서 '대리인 1명(법인포함)이 보유할 수 있는 인원은 총 15명(구단당 3명) 이내로 제한한다'고 못 박았다. 현장에서는 이 제한을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꽤 크다.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한편에선 "현행 규정을 먼저 잘 지키라"고 지적한다. 지난 4일 확보한 자료에는 대형 에이전시가 편법으로 개인 대리인을 따로 등록해 운영하는 게 확인됐다. 인원 제한에 걸리지 않기 위한 일종의 '꼼수'이다. 일부는 대리인이 아닌 매니지먼트 계약으로 전환해 선수 보유 폭을 넓힌다. 선수는 대리인 계약을 했지만, 대리인 측에서 매니지먼트 계약으로 분류해 선수협에 신고하지 않은 케이스도 적지 않다.
C 씨는 "현재 벌어진 문제(미등록 대리인 사건)를 수습하는 게 먼저다. 이후 인원 제한을 비롯해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게 맞다"고 했다. 공인대리인 제도를 잘 아는 야구 관계자 H 씨는 "인원 제한을 두는 건 편법을 조장하는 구조다. 2~3명 가짜 법인을 만들어서 운영할 수 있다"며 "곯아서 문제가 터지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다만 선수를 등에 업고 움직이는 것처럼 (특정 대리인이) 선수협을 사유화하는 느낌도 강하다"고 지적했다. 공인대리인 자격증이 있는 변호사 I 씨는 "인원 제한 규정을 푸는 게 맞다. 하지만 규정이 부당하다고 해서 그걸 안 지키는 건 말이 안 된다. 있는 규정을 일단 지켜야 한다"고 했다.
"자격증 장사를 한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선 선수협이 달라져야 한다. 제도가 얼마나 투명하게 운용되는지 반성이 필요하다. KBO 대리인 제도의 숙제다.